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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재 신작소설(2)] '바보 죽음'
[신덕재 신작소설(2)] '바보 죽음'
  • 신덕재 중앙치과원장
  • 승인 2018.08.12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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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재 원장
신덕재 원장

<1일째>
아픔.
아리다, 쑤신다, 애린다, 쏜다, 띵하다, 쓰리다
아픔의 정도가 몸이 견디기에 힘들거나 거북하거나 고통스러운 정도가 아니다. 자극이란 자극은 다 끌어다 신경의 심부를 때리고 후벼 파고 짓누르고 비비고 있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로 지금의 고통을 다 말할 수 없다. 우리 몸은 외부 자극에 대해 자동으로 반응을 한다. 모기에 물리면 가려워지고 가려워지면 자기도 모르게 긁게 된다. 이것은 자율신경에 의한 반사작용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의 아픔은 그런 단 한 가지 반사작용의 자각증상이 아니라 복합적인 고통의 덩어리이다. 그러니 한 가지 자극이나 반사작용으로 고통의 아픔을 느끼고 감지하여 이에 대응할 수 없고 단지 아픔이라는 단어 하나로 지금의 고통 덩어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30%는 넘지?”
“30%가 무어야, 70%는 되겠다.”
“어떠하다 이 모양이 됐는지 모르겠네, 꼭 개 끄실러 논 것 같네”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럼 내가 지금 개(犬)를 끄슬러 놓은 상태란 말인가? 개를 끄슬러 놓았다고 하니 생각이 난다. 몇 년 전 장마도 들고 날씨도 삼복허리라 일거리도 없어서 칠장이 꾸미들이 개장국이나 끓여 먹자고 해서 개를 잡던 일이 생각났다. 개의 목에 철사줄을 묶어 질질 끄니 이놈의 개가 자기 죽으러 가는 줄을 아는지 죽으라고 발버둥을 쳤다. 앞에서는 철사줄을 잡아당기고 뒤에서는 몽둥이로 개의 엉덩이를 때리면서 앞으로 가도록 재촉했다. 잡아당기는 힘에 목이 조여서 혓바닥을 축 내밀고 흰 게거품을 줄줄 흘렸다. 그래도 개장국을 먹겠다고 철사줄을 소나무 가지에 걸어 힘껏 잡아당기니 어쩔 수 없이 개새끼가 소나무 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몽둥이로 개의 머리를 내려치니 다리를 한번 퍼득퍼득 허우적거리더니 짧은 경련과 함께 축 늘어졌다. 죽은 것이다. 소나무에서 개를 끌어 내린 후 소나무 삭정이와 마른 풀로 개를 태우기 시작했다. 노린내와 함께 뽀얀 연기가 하늘로 올라갔다. 마침내 거무티티 하고 희끗희끗한 살점이 보이는 경직된 개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지금 나의 모습이 그 개란 말인가? 그러면 질질 끌려가던 개의 고통이 지금의 나의 아픔과 같다는 말인가? 삭정이와 마른 풀로 끄슬러 놓았던 검푸른 개가죽의 모습이 나란 말인가? 헛구역질이 나고 그때 먹은 개장국이 올라오는 듯하다.
내가 왜 여기에 와 있지? 아 그래 맞다. 돼지사장이 변전소 철탑에 뺑기칠을 해 달라고 했지. 철탑 뺑기칠이 나의 주특기는 아니나 요새처럼 일거리가 없다보니 돼지사장의 청을 거절하지 못했지.
그러니까 30년 전, 내가 군대를 제대했을 때 돼지사장, 아니 유규현은 내가 부리던 시다였다. 페인트칠로 말하면 유규현은 형편없는 존재였다. 나는 군대 가기 전부터 뺑끼칠을 했기 때문에 오야지에 가까웠으나 유규현은 별 볼 일 없는 잔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70년대 새마을 사업의 하나인 주택개량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시책으로 그와 나는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초가지붕을 허물고 슬레이트 지붕에 페인트칠을 하는 새마을 사업에만 매달렸다. 페인트칠이라는 기술에는 반 푼어치의 신경도 쓰지 않고 해바라기처럼 관급 페인트 일에만 따라 다녔다. 그 덕택에 돈을 벌어서 지금은 중견 사업체를 가진 사장이 됐다. 나는 그때 유규현을 도둑놈, 사기꾼, 뚜쟁이, 돼지사장이라고 흉을 봤다. 뺑끼쟁이는 뺑끼쟁이여야 하고 페인트칠이란 기술, 아니 칠 정신이 깃든 예술적 기능이어야지 공무원이나 공공단체만 찾아다니면서 뒷돈이나 주고, 관급을 따서 날품팔이하는 칠장이에게는 쥐꼬리만한 일당만을 주고는 나머지 거금을 챙기니 그런 사람을 뺑끼쟁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나는 유규현의 노릇이 싫어서 일반주택의 단장 일에만 정신을 쏟았다. 집 단장은 참 재미있다. 한번 칠하면 새집이 하나 생기고 다시 한번 칠을 하면 또 다른 새집으로 변한다. 칠을 할 적마다 색깔이 영롱하게 빛나고 집주인이 좋아하면 나는 희열을 느꼈고, 내가 진정한 칠장이이고 페인트공이라 생각했다. 그러니 돼지사장을 우습게 볼 수밖에…
그런데 요새는 사정이 달라졌다. 경기도 없고 일거리도 없는 데다 나이가 들고 보니 돼지사장을 도둑놈 사기꾼이라고 우습게 생각했던 그때의 일들이 어리석고 바보스런 생각이 든다. 70, 80년대는 경기가 좋았다. 건축 붐이 일어나 여기저기서 페인트공을 찾았다. 이때 장가를 갔어야 했다. 좋은 때 장가를 못 갔으니 나이 들고 살기 어려우니 장가를 갈 수 있었겠는가? 사실 장가를 못 간 것은 유규현을 도둑놈 사기꾼으로 치부했던 바보 같은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내가 4살이 되던 1.4 후퇴 때 부모를 잃고 할머니와 여동생과 같이 월남을 했다. 내가 장가를 갈 때쯤 되었을 때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여동생도 시집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혼자 페인트칠로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였지만 경기가 좋은 때라 장가가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마음에 걸려 나보다 먼저 결혼을 시켰다. 이는 단지 오빠의 의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니 이 또한 바보 같은 생각이었다. 여동생의 결혼이 어쩌고 저쩌고 할 것 없이 아무 여자나 하나 꿰찼으면 지금처럼 추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동생을 결혼시키고 나니 푼푼이 모아둔 돈도 다 거덜 나고 단지 전세방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빨리 장가를 가야 마음도 잡고, 집도 장만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장가들라고 했지만, 집 한 칸 없이 장가만 갔다가, 남의 여자 생고생시킬 일이 걱정이 됐다. 이런 생각은 모든 사람이 당연히 가지는 것이라 믿었다. 아무리 경기가 좋은 때라 하지만 이런 느긋한 마음으로 세월만 보냈으니 얼마나 바보스러웠나? 그리고 보니 집 한 칸 없이 장가간 돼지사장도 지금은 더 잘 살고 멋지게 사는데 말이다. 사실 내가 집 한 칸 아니 연립주택 15평짜리 하나 장만한 것도 97년도가 돼서 그것도 은행 융자를 받아서 겨우 장만을 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나. 어쨌든 좋은 시절을 바보 생각으로 다 보내고 돼지사장 같은 친구로부터 변전소 철탑 뺑기칠을 부탁받는 처지가 되었다.
변전소 철탑은 ㄱ자 모양의 철강을 나사 볼트로 엇 이어서 만든 구조물이다. 수색 변전소는 서울 서부지역과 경기도 일산 고양 지구의 전기를 공급하는 곳으로 규모가 엄청났다. 철탑이 기차길의 전신주처럼 일직선으로 늘어선 모습이 북경 자금성의 회랑 기둥과 같다. 일정한 간격으로 격자 모양의 방을 연상케 하는 구조물에 은색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다. 도색을 함으로써 철제 구조물의 부식도 막고 전기 누전을 차단한다고 한다. 철탑의 높이는 6m이고 3m 위치에 1.5m 간격으로 2단의 전기 선로(線路)가 지나간다. 그러니까 철탑 하단 부위에서부터 전기 선로가 지나가는 철탑 상단까지 은색 페인트를 칠하는 일이다. 다른 페인트칠과는 사뭇 다르다. 요사이는 주로 컴푸레셔로 공기를 압축하여 페인트를 분사시켜 페인트칠을 많이 한다. 그런데 철탑 페인트칠은 일일이 페인트 붓으로 ㄱ자 모양이나 ㄴ자 모양의 후미진 철 구조물 부위를 손으로 칠해야 한다. 사실 돼지사장의 청을 거절하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는 철탑의 페인트칠이 분사식이 아니고 손으로 직접 칠해야 한다는 것이다. 페인트칠이라는 것은 손으로 일일이 칠하면서 손놀림의 붓 맛을 느낄 수 있어야지 물뿌리개처럼 쭉 뿌려서 칠을 하면 칠이 살아나지 않고 죽은 칠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철탑 칠은 붓 맛을 느낄 수 있는 칠이어서 좋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일하기가 더럽게 힘들다. 이번 철탑 일도 그렇다. 그래도 하단 ㄱ자나 ㄴ자 부위의 구부러진 곳은 보고 칠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보이는 곳이니 쉽게 칠할 수 있다. 그런데 상단 부위는 그렇지가 않다. 특히 ㄱ자 부위의 윗면은 그 위에 올라가지 않고는 손을 꼬부려 칠을 해야 한다. 힘이 들더라도 손놀림을 바르게 하여 후미진 곳까지 잘 칠할 수 있어서 나에게는 흥이 났다.
전기공사를 하기 위해서는 안전수칙을 지켜야 한다. 손에는 고무장갑을 끼어야 하고 단전 헬맷을 써야 한다. 15만 볼트 이상의 전기가 흐르는 곳에서는 전선 50㎝ 내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현장 감독은 5m 이내에서 페인트공의 작업을 주시해야 한다. 모든 작업에 앞서서 전기의 흐름을 죽이고 안전한 상태에서 시공해야 한다.
돼지사장은 어떠했는가? 안전수칙? 돼지사장의 머릿속에는 안전수칙이란 단어는 없다. 다만 하루빨리 공정을 끝내 일꾼의 일당을 줄이고, 페인트의 사용량을 줄여, 관급을 딸 때 친 기름값을 얼마나 많이 빼느냐 하는 것뿐이다.
나는 오늘 김씨와 같이 뺑기칠을 했지.
김씨는 돼지사장이 데리고 있는 날품팔이이다. 김씨는 한 칸 건너에서 칠을 했다. 김씨를 건너다보니 김씨는 하단을 모두 칠하고 상단을 칠하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엉망으로 칠을 했다. 어려운 곳은 칠을 하는 둥 마는 둥 한번 붓질이 지나가고 말았다. 페인트칠이라는 것이 남 눈 속이기가 아주 쉽다. 정말로 칠을 잘하려면 먼저 접착성 높은 칠을 하고 다음에 애벌 칠을 하고 다음에 윤이 나는 칠을 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마다 붓질을 여러 번 해서 골고루 페인트가 퍼져 있어야 한다. 이것이 손놀림의 붓 맛인 것이다. 김씨가 한 것을 보니 처삼촌 벌초하듯 희끗희끗 듬성듬성 대충대충 칠한 모양이 역력하다. 그래도 빠른 시간 내에 칠을 마치니 돼지사장에게는 훌륭한 일꾼인 것이다. 그 사장에 그 일꾼인 것이다. 그렇다고 김씨를 나무랄 수 없다. 나도 돼지사장 밑에서 김씨와 같이 일하는 처지에 남보고 콩이네 팥이네 참견할 처지가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나대로 일을 했다. 집 칠을 하면서 느꼈던 손놀림의 붓 맛을 느끼면서 장이답게 칠을 했다. 오후 새참을 먹고 나니 김씨는 칠을 거의 마쳤다. 김씨도 오후 새참까지는 일을 한다. 그 전에 끝나면 오후 새참을 못 먹으니 말이다. 아직 나는 상단의 칠이 남았다. 김씨가 칠한 상단 칠은 하단보다 더 엉망이다. 쉬운 곳도 형편 없는데 어려운 곳은 어떠하겠는가? 하여간 엉망으로 칠을 했다고는 하나 15만 볼트가 흐르는 상단의 ㄱ자 부위의 윗면을 어떻게 칠했는지 알 수가 없다. 인정사정없이 흐르는 고압의 전류를 잘도 피해 칠을 했다. 김씨의 신통력에 가까운 칠 솜씨에 감탄이 절로 났다. 이제는 나도 상단 ㄱ자 부위의 윗면을 칠해야 한다. 나는 신나통을 옆구리에 차고 상단 부위로 올라갔다. 3m 위치에 올라간 나는 한번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3m 높이가 결코 낮은 곳이 아니었다. 그곳에서 보니 김씨가 칠한 것이 더욱 또렷이 보였다. 저 칠은 돼지사장의 입맛에 맞는 칠이다. 김씨는 모든 일이 끝났는지 주섬주섬 도구를 챙기고 있었고, 현장 감독인 돼지사장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보니 나 혼자 일을 하고 있었다. 김씨가 ‘이 바보야 대충 대충하고 내려와, 그런다고 일당 배로 주냐?’라고 비웃는 듯 힐끗 나를 한번 쳐다보았지만, 나는 다짐을 했다. ‘그래도 일을 마쳐야지. 그것도 제대로 해야지. 이 친구야!’ 옆구리에 찾던 신나통을 철제 구조물에 올려놓고 왼손으로 철제를 잡고 오른손으로 ㄱ자 윗면을 칠하기 위해 손을 한껏 뻗쳤다. 그 순간, 찌지직 소리와 함께 흰 섬광이 스쳤고, 나는 튕겨 나가 옆 철 구조물 상단에 신나통을 뒤집어쓰고 불길에 휩싸였다. 그러고 나서 나는 정신을 잃었고 지금처럼 고통의 덩어리 속에 있다.

<2일째>
머리털과 눈썹은 오그라들어 나사형의 재(灰)로 되었고, 이마와 귓밥과 콧등은 껍질이 벗겨져 진물이 나오고 있다. 얼굴 전체는 검푸른 가운데 입술만 붉게 충혈되어 마치 쿤타킨테와 같은 흑인 노예 같다. 왼쪽 팔은 신나통의 불길 때문에 더욱 심해서 손톱은 지글지글 타다 남은 플라스틱 바가지 모양이다. 엎어져 쓰러지는 바람에 배 쪽은 다소 제 살이 있으나 등 쪽은 신나가 지나간 자리마다 오염된 강줄기처럼 등판이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아랫배와 사타구니와 성기는 물집이 생겨 옹골옹골 하다. 양다리는 덜 탄 숯가마의 장작개비 같다.
끄슬린 화상의 정도가 3도 화상으로 팔 18%, 다리 36%, 몸통 18%, 머리와 목 9%, 성기 1%로 70%가 훨씬 넘는다. 3도 화상이 25% 이상이면 생명이 위험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제 의사들이 30%가 어떻고 70%가 어떻고 하면서 나를 개 끄슬러 놓은 것 같다고 한 모양이다.
가망은 없어도 성의를 보이기 위해 기도를 확보하고 산소 호흡기를 달아 주었다. 갈증과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특히 갈증이 심했다. 다리로부터 올라오는 통증은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을 정도다. 링거액을 주사하는 모양이다. 다소 갈증이 가시는 듯하더니 이번에는 온몸이 에어백처럼 팽창되어 신경을 압박하는 압박 통증, 즉 옛 고문의 하나인 압슬의 고통이 일어났다. 온몸은 부푼 풍선처럼 부종이 생겨 윤곽을 알아볼 수 없다.
이런 만신창이 속에서도 다행인 것은 전기충격이 심장을 빗겨 갔다는 것이다. 그 덕에 심장은 뛰고 있다. 심장이 뛰고 있다면 나는 살아 있다는 것이고 이 순간 생을 유지하고 있다는 뜻이다. 전기가 혈관을 통과하는 바람에 혈관 화상을 입었다. 폐부종과 혈관 화상으로 호흡은 곤란하나 호흡기를 달고 있어 아직 숨을 쉴 수 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아픔을 느끼고 있으니 나는 살아 있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무리 의사들이 나의 생명을 비관적으로 보더라도 내가 살려는 의지가 강하면 강할수록 의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이런 생각에 미치자 나는 더욱 초조하고 불안하다. 살아나야 한다. 기적을 이루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이대로 죽는다면 나의 지난날이 너무나 허무하고, 초라하고, 바보스럽다.
“이 정도의 화상이라면 전혀 가망이 없습니다.”
젊은 의사가 거의 단정적으로 선언을 했다.
죽음
의사는 환자의 아픔을 없애 주고 삶을 연장해 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다. 죽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희망을 환자에게 심어주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아직도 숨 쉬고 있는 나를 살릴 생각은 하지 않고 죽을 거라고 예진(豫診)을 해 버리면 나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지금 나에게는 의사 선생님뿐이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고, 아픔을 느끼고, 생각을 하는데 왜 내가 죽는단 말인가? 의사 선생님이 야속하다. 나를 살려 주시오, 나를! 애원도 하고 원망도 해 보지만 의사 선생님은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특별히 치료할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졌다.
경찰이 나타났다. 저며오는 고통 속에서도 경찰은 나를 으스스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일을 마치고 술을 거나하게 먹고 집에 오다가 뻑치기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쨉새 경찰이 어떻게 하였던가? 뻑치기한 놈들을 잡을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네 관내에서 이런 재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고 투덜대면서 술 먹은 나만 탓하고 귀찮다는 듯이 사건을 얼버무려 버리지 않았던가. 그 후 나는 쨉새들만 보면 피하게 되고 공연히 죄를 지은 것만 같아서 오금을 못 피고 식은땀을 흘렸다.
“현장소장인 유 사장이 사건 전말을 자세히 진술해 보시오”
“예, 그러니까, 핸드폰이 와서 잠깐 돌아서서 전화를 받는데 갑자기 퍽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보니 구씨가 타고 있더라고요”
아니 저 친구는 돼지사장 아닌가? 분명 내가 상단 철탑에 올라가 보았을 때, 돼지사장은 없었는데 경찰 앞에서는 자기가 현장에 있었다고 거짓말을 하는구나. 에이, 이 나쁜 놈 같으니! 야 인마! 바른대로 말해 이놈아! 하긴, 의사 선생님도 내가 죽을 거라고 말했고, 내가 죽으면 증거도 없을 것이니 현장에 현장소장이 있었다고 한들 누가 뭐라 하겠는가? 행여 없었다고 하였다가 안전수칙 미비가 어떻고 저떻고 하면서 죄값이나 더 받을 것이니, 손바닥 뒤집듯 거짓말을 한들 어떠하겠는가? 참 더러운 세상이다.
“다음으로 같이 현장에 있던 김씨 아저씨가 말해 보시오”
김씨도 왔구나. 김씨는 돼지사장보다 더 주눅이 들어있었다. 아마 나처럼 언젠가 쨉새한테 당한 모양이다.
“예, 저, 그게 이렇게 됐습니다요. 일이 끝났지요. 일이 끝났으니 저는 시마이하려고 연장을 챙기고 있었지요. 그래서 구씨는 보지도 못 했지요”
“아니 구씨가 상단 철탑에 올라가는 것도 못 봤단 말이요”
“예, 예 그렇지요. 못 본 거지요”
아니 저 김씨도 거짓말을 하네. 나를 못 보기는 왜 못 봐! 분명히 내가 상단철탑의 ㄱ자 윗면을 칠하려고 올라가는 것을 보지 않았어? 똑바로 말하란 말이야. 못 보았으면 못 보았지, “못 본 거지요”가 뭐란 말인가? 어처구니가 없다. 내가 빨리 일어나야 한다. 일어나서 거짓말투성이 저들의 주리를 틀어놔야 한다.
“일도 끝났는데 왜 구씨가 철탑상단으로 올라갔단 말입니까?”
“구씨 혼자서 위험한 철탑 상단을 올라갔단 말입니까?”
“혹시 자살이라도 하려고 한 것 아닌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내가 자살을 하려고 철탑상단에 올라갔다고? 자살! 자살! 자살 좋아하네. 나는 일을 깨끗이, 야무지게 하려고 철탑상단에 올라갔다. 이것들아!
“그러게 말입니다. 일도 다 끝났는데 왜 구씨가 철탑 상단으로 올라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속상한 일이 있었나…?”
돼지사장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면서 내가 자살을 하려고 철탑 상단에 올라간 것처럼 넌지시 자살 기도를 암시했다.
경찰은 이번 일을 자살로 처리해야 사건처리가 쉽고, 돼지사장도 자살로 밀고가야 안전수칙 미비라든가 안전교육 미비와 같은 골치 아픈 일이 없을 것이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고, 북 치고 장구 치는 격이다. 북 치는 경찰은 나보다 유 사장을 두둔해야 일 처리가 잘 된다. 어차피 구씨는 죽을 것, 타살이나 사고사로 인한 변사체로 처리하면 검사의 사건지시를 받아야 하고 가해자나 피해자의 조서를 받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어야 하니, 구씨 스스로 자살에 의한 사망으로 처리하면 이런 번거로움이 없어질 것이고, 일 처리를 유 사장에게 유리하게 잘 마무리하면 유 사장으로부터 뒷돈도 받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경찰은 김씨에게 다시 자살을 확인이라도 하듯이 다구처 물었다.
“김씨 아저씨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글쎄요….그럴지도 모르지요. 여편네도 없고 애새끼도 없으니 살맛이 나겠습니까?”
김씨의 말은 결정적으로 나를 자살로 만들었다. 무식한 사람은 야료를 못 부리고 곧이곧대로 말한다는 통설이 있지만, 무식한 김씨가 야료를 부리니 야료라면 둘째가기 싫어하는 돼지사장을 능가한다. 이것은 분명 쨉새, 돼지사장, 김씨가 짜고 하는 일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서로 말이 맞아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쨉새는 얼리고, 돼지사장은 추스르고, 김씨는 오금 박고, 삼박자가 잘도 맞는다. 이놈들아!
죽지도 않은 사람을 죽은 사람으로 만들다니 억울해서 못 살겠다. 내 꼭 살아서 네놈들의 조작을 만천하에 알리리라. 내가 흥분을 했나? 고통의 아픔이 더욱 더 저려오고 쓰려온다. 특히 발 쪽의 아픔이 심하다. 이제 발은 흑감댕이가 되어 있다. 숯과 같다. 발바닥 가죽은 타다만 숯 장작개비처럼 줄줄이 골이 패여 있고 그 사이로 진물이 흔건히 흘러나온다. 오줌이 안 나온다. 성기는 오그라들어 번데기처럼 쭈글쭈글하고 벗겨진 자리에는 물집이 고여, 마치 희뿌연 곱태가 낀 것 같다. 쑤시고 아린 찌름이 한순간에 오는 듯하더니 갑자기 온몸이 깃털처럼 사뿐히 내려앉고 거품이 소리 없이 사그라지듯이 가볍고 홀가분해진다.
페인 ㅤㅆㅑㄱ(Pain Shock :동통쇼크)이 일어난 것이다. 동통쇼크는 아픔의 정도가 심해 참으려는 정신적 한계를 넘어서 극한 상황에 이르렀을 때 아픔을 깨닫지 못하도록 한순간에 정신을 잃게 하는 보상현상으로 일어나는 생리적 현상이란다. 아픔의 신경자극이 극에 달하면 페인 ㅤㅆㅑㄱ이 오는 모양이다. 지금 내가 아픔의 극에 도달한 것이다. 그 놈의 쨉새와 돼지사장, 김씨의 엉터리 수작에 의한 흥분, 양다리로부터 오는 동통이 나를 더 이상 지탱케 하지 못하고 정신을 잃게 한 것이다. 정신을 잃었다면 내가 죽었다는 것인가? 그러면 어지럼증이나 기절도 죽음 현상인가? 기절이나 어지럼증이 정신을 잃은 것이긴 하나 심장이 뛰고 숨을 쉬니 죽은 것은 아니다. 그러니 페인 ㅤㅆㅑㄱ도 죽은 것은 아니다. 다만 고통을 이기지 못해 생긴 삶의 현상인 것이다. 삶의 현상! 삶! 삶! 살아 있구나! 누가 뭐라 해도 나는 살아 있다. 심장이 뛰고 숨을 쉬면서 내가 살아 있는데 왜 가망이 없다느니 자살이라느니 떠들어대는지 모르겠다.
“아 참, 골치 아파 죽겠네, 마누라라도 있어야 피해자 조서를 받을 텐데 연고자가 아무도 없으니 말이야”
경찰이 장가 못 간 나를 나무란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자기라도 편하게 할 일이지 모두 가는 장가도 아직 못가서 자기를 성가시게 군다고 투덜댄다.
“유 사장, 구씨 여동생이 있다면서 어디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요?”

<3일째>    
회색빛 벽면에 링거병이 겹쳐져 보이는데 벽에 붙어 있는지 떨어져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다만 링거병에서 떨어지는 액체만이 큰 충격으로 다가와 나의 가슴을 치고 있다. 이 충격은 흐릿한 감각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신경세포의 자극으로 찢어지게 저며 오는 신체적 고통의 충격이다.
아픔
사랑의 아픔, 정(情)의 아픔, 열패(劣敗)의 아픔, 실연의 아픔, 낙오의 아픔이 큰들 신경세포의 충격에 의한 아픔만 할까?
병원이 소란스럽다. 통곡의 울음이 이어졌다. 여동생이 온 것이다. 나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온 것이다. 보고 싶다. 안아주고 싶다. 손이라도 잡고 싶다. 왜 몸이 말을 안 들을까? 어제의 동통쇼크 이후 다리로부터의 아픔은 없다. 다리가 죽어서 무감각해진 모양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신경세포의 충격에 의한 아픔이 제일 큰 아픔인 줄 알았는데 동생이 나타나고 보니 그리움, 연정, 영욕, 회상과 같은 인연의 아픔이 엄습해 온다.
바보스런 생각, 아니 나의 의무라고 나 자신을 희생하면서 보낸 여동생의 시집살이가 살듯하고 행복했다면 인연의 아픔이 그리 크지 않았으리라. 결혼한 여동생의 첫 아이는 항문이 막힌 기형아를 낳았고 어린 조카의 수술이 몇 차례 계속되면서 여동생과 매제와의 사이는 벌어지고 말았다. 매제는 술과 방탕한 세월로 이어지면서 가정을 돌보지 않았고 그때마다 나는 동생에게 생활비와 병원비를 충당해 주었다. 그러기를 10년이 넘었다. 이런 고생과 노력 속에도 조카는 이승의 연을 못하고 죽었고 매제는 술로 세월을 보내다 간암이라는 병을 얻게 되었다. 이 또한 나의 몫이었다.
저런 여동생이 지금 왔다. 에이! 빌어먹을 세상! 잘살아보려는 사람에게는 더 고생을 주고, 더 죽어라 하니 이놈의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란 말인가? 운(運)이 어디 있단 말인가? 운이란 한번 나쁘면 다음에 좋을 수도 있는 법인데, 줄곧 나쁘기만 하니 운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야 이 씨팔놈들아! 우리 구씨 형 살려내란 말이야! 이 좃가튼 놈들아! 돼지사장놈 어디 갔어?”
돼지사장 유 사장은 어제 이후로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이곳에 있으면 막노동판의 일꾼들로부터 치도곤을 당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어제 쨉새와의 조작된 자살 진술 이후 어디로 갔는지 사라지고 없다. 지금 소란을 피우는 녀석은 땅딸보 서씨다. 우리는 땅딸보 서씨를 ‘딸보 서씨’라 부른다. 술을 많이 먹어 코가 딸기코에다 키가 작달막해서 부친 말이다. 작은 키에 술을 먹으면 주사가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상대를 안 하려고 한다. 사실 막노동판에서 술주정이나 술판 싸움이 큰 흉은 아니다. 그런데도 ‘딸보 서씨’가 많은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것은 술주정보다 흐린 샘과 심한 투전놀음 때문이다. 나도 그의 흐린 샘에 당했다. 2년 전 급하다는 말에 돈을 빌려줬다. 그 후 그는 소식도 없고 돈도 갚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지금 갑자기 나타나서 나를 끔찍이도 생각하고 나의 보호자처럼 소란을 피우고, 개판을 치는 모양을 보니, 좀 어쭙잖다. 정말로 나를 위했다면 지금까지 나를 괴롭히고 걱정스럽게 했던 빌려 간 돈을 갚았어야 했다. 그리고 자기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었어야 했다. 그런데 그 일에는 일언반구도 없이 내가 죽을 지경이 되니 나타나서 자기가 마치 보호자이고 나를 대신하는 양 떠들어대고 고함을 치니 어처구니가 없고 한편으로 괘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사실 딸보가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좋을지도 모른다. 지금 나하고 현금 보관증이나 차용증서를 주고받은 사이도 아니고 돈을 빌려줄 때 누군가 함께 있었던 것도 아니니 시치미 떼고 자기가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고 떠든들 누가 알 것인가? 또 혹시 내가 죽기라도 하면 지금까지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니 이참에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한껏 내세울 만하다. 에이 몹쓸 자식! 그렇게 가식으로 한다고 너의 마음이 좋겠냐? 이 친구야! 하긴 내가 어리석고 몰라서 저런 친구한테 돈을 빌려주고 마음고생을 한 것이 잘못이지…….
“이렇게 고함친다고 해결이 됩니까? 진정하시고 아픈 병자를 생각합시다.”
아하, 찬영이 왔구나. 찬영이가 왔으면 일이 잘 해결될 것이다. 그러면 나도 자살이 아니고 안전수칙 미비에 의한 사고로 처리될 것이다. 찬영이 하고 나하고는 요상한 사이다. 찬영이 아버지와 나의 이모가 결혼을 하였으니 찬영이 아버지가 나의 이모부가 된다. 그러면 찬영이 하고는 이종사촌간이다. 그러나 사실은 남남이다. 또 친구이기도 하다. 나의 이모가 찬영이 아버지에게 시집을 갔다가 죽는 바람에 찬영이 어머니를 재취로 맞이했다. 찬영이는 이모부의 자식이니 나하고 이종사촌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찬영이 어머니는 나의 친이모가 아니니 남남이라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북에서 월남하여 이웃에서 살며 친구처럼 지내다 보니 친구이기도 했다. 나의 이모부인 찬영이 아버지는 월남을 못 했고 찬영이 어머니와 찬영이만 월남을 했다. 찬영이는 찬영이 엄마 덕분에 대학을 나올 수 있었고 지금은 무슨 노동관계 사무실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어려서 아무것도 모를 때는 친척이려니 하고 친하게 지냈으나 찬영이가 대학을 다니고 나도 찬영이와의 요상한 관계를 어렴풋이 알게 된 후부터는 사이가 멀어지고 또 나 스스로 찬영이를 멀리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찬영이가 지금 와 있다.
“지금 경찰서에 가보니 봉근씨가 자살기도로 돼 있는데 이를 바로 잡아야 해요”
“자살로 처리되면 병원비도 얼마 안 나오고 사망을 했을 경우에도 합의하기가 매우 어려워요. 노동법에 치료비와 보상금이 나오게 되어 있으니 흥분하지 말고 차근차근히 합시다. 나는 경찰서에 가서 사건처리를 다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찬영이의 말이 효험이 있었는지 초조감도 사라지고 모든 아픔의 고통도 눈 녹듯이 사라지고 있다.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 다만 의식이 흐릿하고 졸리며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의사들은 어디 갔어! 좃가튼 새끼들 지금 구씨형이 죽어가고 있잖아! 이 씨팔놈들아!”
딸보가 간 줄 알았는데 가지 않고 회진 도는 의사들을 붙잡고 실랑이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딸보가 내가 죽어가고 있다고 하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아픈 곳도 없고 마음도 편해, 다 나은 것 같아 걸어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것 같은데 내가 죽어가고 있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저 자식이 나를 보내려고 하는 모양이지? 네가 아무리 나를 보내려고 발버둥을 쳐도 나는 안 죽는다. 이놈아.
“어, 정말로 오늘 넘기기가 어렵겠는데! 빨리 보호자들 오라고 하고 경찰서에도 알리세요.”
산소 호흡기를 떼는 모양이다. 목젖 아래가 따끔따끔하다.

<4일째>
숨이 가쁘다. 그렇게도 조용하게 있던 가슴이 용솟음치는 용천 같이 솟아올랐다 가라앉고 한다. 기도에서는 쌕쌕하는 휘파람 소리가 난다. 공기가 어디를 거칠게 부비며 지나가는 모양이다. 그런데도 아픔의 고통은 없다. 이제는 용천의 숨 가쁨도 사그라진다. 다만 여기저기서 수군대는 소리인지 걱정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모기소리만 한 것이 들릴 뿐이다.
“운명 하셨습니다.”
운명(殞命)! 운명이라면 내가 죽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왜 죽어? 아픈 사람이 아프지 않으면 다 나았다는 것 아닌가? 지금 나는 아무 데도 아프지 않다. 아픈 데가 없으니 편안하고 행복하다. 고통이 없어지니 기쁘고 지난 일들이 아름답다. 돼지사장이 왜 이리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해 주지 않았는가? 딸보 녀석은 어떠한가? 그래, 네가 잘못한 것이 뭐냐? 나 혼자 공연히 애태우고 고심했을 뿐이지. 너는 잘못한 것이 없지? 찬영! 찬영이, 너는 나의 하늘이고 바램이다. 네가 있어서 나는 힘이 나고 살맛이 났단다. 이렇게 너그러운 마음으로 충만한 내가 왜 죽었단 말인가? 나는 죽음의 암흑이 싫다.
나는 일어나고 싶다. 일어나 걷고 싶다. 걸어 나가 밝은 빛을 보고 싶다. 저 광채는 무엇일까? 알 수 없는 빛이 들어온다. 흰빛이로구나. 흰빛이 나의 온몸을 감싼다. 흰빛에 이끌려 일어나 앉는다. 이때
“외삼촌! 외삼촌은 왜 그렇게 어리석어요?”
아니, 저 녀석은 나의 하나밖에 없는 조카 재규가 아닌가? 야 재규야! 너의 막힌 항문은 다 나았니? 언제 이렇게 컸니? 사실 너에게 참 미안하다. 막힌 항문을 고쳐 주지도 못하고…
“외삼촌! 내가 수술을 당할 때마다 얼마나 아프고 고통스러웠는지 아세요?”
그래 안다 알아. 지금 내가 아픔의 덩어리 속에 있고보니 너의 고통이 어떠했는지 알 것만 같다. 미안하다. 미안해.
“미안해할 것 없어요. 다 외삼촌이 못나고 어리석어서 그래요! 돼지사장 보세요. 외삼촌이 돼지사장을 도둑놈 사기꾼이라고 하지만 지금 돼지사장은 남보란 듯이 잘살고 있잖아요. 그리고 지금 돼지사장은 외삼촌을 죽은 개(犬) 거적에 말아 버리듯이 버리려고 해요.”
야, 재규야! 이렇게 오랜만에 만났는데 돼지사장 얘기는 왜 하니? 떵떵거리고 잘 사는 돼지사장이 어때서 그러냐? 돼지사장은 돼지사장대로 사는 것이고 나는 나대로 살아왔지 않니? 설령 돼지사장이 나를 거적에 말아 버린다 한들 내가 나쁜 놈이냐? 돼지사장이 나쁜 놈이지. 자 봐라. 내가 아프다고 하니까 ‘딸보 서씨’ 아저씨, 찬영이 아저씨 등 많은 사람들이 위로하려고 오지 않니? 이 얼마나 좋으냐? 재규야, 너무 나를 나무라지 마라. 나도 힘겹게 살았단다.
“외삼촌! 정신 차리세요. 딸보 아저씨가 외삼촌을 위로하러 왔다고요? 어림도 없는 소리예요. 돈 떼어먹으려고 온 거예요. 그리고 찬영이 아저씨도 노동쟁의 사건 하나 맡으려고 온 거예요. 알았어요?”
재규야! 너는 왜 자꾸 이 외삼촌을 슬프게 만드니? 돼지사장이나 ‘딸보 서씨’나 찬영이 아저씨가 나를 위해 일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나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지 않니? 나도 좀 자랑스럽고 보람된 일들이 있었어야 하지 않니? 너는 내가 지금까지 어리석고 바보스럽게 살았다고 볼는지 모르나 나는 지난 일들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하다. 그래도 나는 참되게 살았다. 바보가 누구인지 어리석은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겠다. 이 녀석아! 나는 지금까지 아무한테도 빚을 지지 않았다. 다만 너를 고통 속에 보낸 것이 나의 빚이란다. 이해해다오. 그래도 나는 너뿐이다. 너를 사랑한다. 지금 나에게 하는 너의 소리는 다 더러운 세상을 두고 하는 말이지? 그렇지? 네가 나에게 무슨 소리를 하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
사랑이라는 말과 함께 차디찬 흰 빛이 서서히 사라지고 보랏빛이 스며든다. 보랏빛! 숭고의 빛이로구나. 어둡고 더러운 것을 지나 깨끗하고 맑은 심연에 사랑의 참 빛이로구나. 참 마음의 보랏빛에 비친 재규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눈물과 함께 보랏빛이 점점 더 짙어지면서 그렇게 씩씩하고 건장하던 재규가 어린애로 변한다. 재규야! 왜 참 마음 아니 사랑이라는 말에 자꾸 작아지고 어린애가 되니? 재규야! 재규야!
저 눈물의 뜻은 무엇일까? 왜 눈물을 흘리면서 순진한 아이로 변할까? 맑고 깨끗한 재규가 마침내
“외삼촌! 나는 외삼촌이 좋아요”
“왜 외삼촌이 바보예요? 절대로 외삼촌은 바보가 아녜요. 사랑해요”
선뜻한 한기가 주위를 감싸는 듯하더니 철제문이 다치면서 암흑으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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