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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재 신작소설4] 울 아빠
[신덕재 신작소설4] 울 아빠
  • 신덕재 중앙치과의원장
  • 승인 2018.09.1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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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재 중앙치과 원장
신덕재 중앙치과 원장

울 아빠는 우리 아빠의 대화체다. 울 아빠는 10대 초등학교 아이들이 또래의 아이들에게 자기 아빠를 자랑하거나 흉볼 때 쓰는 말이다. 예를 들면 “울 아빠가 어제 MP3를 사줬다.” “울 아빠랑 대공원에 놀러 갔었다.” “울 아빠가 어제 술을 많이 드셨다.” 등이다.
내 나이 60이 넘었다. 환갑이 지난 나이에 울 아빠라는 말을 쓰자니 좀 쑥스러운 감이 든다. 이 나이에 울 아빠라는 말을 쓰고 싶은 이유는 내가 유복자처럼 울 아빠의 얼굴도 모르고 기억도 나지 않지만, 무능하고 허접한 울 아빠를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에 알싸하고 알알한 헌데가 있기 때문이다.
울 아빠는 부인이 둘이었다. 그러니까 나의 엄마가 둘인 셈이다. 울 아빠는 첫 번째 부인인 정실부인이 있고 두 번째 부인인 재취 부인이 있다. 정실부인이 아들, 아들, 딸, 아들을 낳고 돌아가셨다. 재취 부인은 딸, 딸, 아들, 딸을 낳았다. 나는 재취 부인의 막내아들이다. 내 동생인 재취 부인의 막내딸이 태어나 1년도 안 돼 죽었기 때문에 나는 정말로 울 아빠의 막내둥이이다. 재취 부인이 나의 생모이고 정실부인은 나의 큰어머니이다.
그러니까 나는 서자인지도 모르겠다. 엄밀히 따지면 난 서자는 아니다. 서자는 본부인이 살아 있는데 첩을 두어서 낳은 아이이나 나는 본부인이 죽은 후 부인을 다시 얻은 재취 부인의 자식이니 서자는 아니다.
그래도 울 아빠는 나를 서자 취급했다. 내가 4살 때인 것 같다. 울 아빠는 학식이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학식이라고 해 봐야 한문 사서나 삼경 정도 읽을 줄 아는 정도라 생각된다. 정실부인의 맏아들이고 나의 최고 큰형은 그때 결혼을 해서 나보다 한 살 많은 아들을 두고 있었다. 울 아빠의 장손이고 나의 장조카이다. 난 장조카에게 불만이 많았다. 왜냐하면 울 아빠는 나보다 장조카를 더 위해 주었기 때문이다. 장조카가 나보다 한 살 더 많기는 해도 울 아빠의 입장에서 보면 나는 아들이고 장조카는 손자인데 왜 울 아빠는 항상 나보다 장조카를 예뻐하고 챙겨주고 신경을 써 주는지 모르겠다.
초여름이었던 것 같다. 울 아빠가 나와 장조카를 불러 천자문을 가르쳐 주셨다. 그때에도 울 아빠는 장조카에게는 크고 잘 인쇄된 천자문 책을 주었고 나에게는 작고 다 해진 필사본 천자문 책을 주었다. 나는 그때 장조카의 천자문 책을 얼마나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울 아빠는 내 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천자문만 가르치느라고 글자를 막대기로 짚어가며 그냥 설명만 하였다. 은근히 화가 났지만 울 아빠가 나에게 공부를 잘한다고 칭찬을 해주어서 맘이 풀렸다.
그 이후 난 울 아빠에게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 울 아빠는 나의 맘을 알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단지 가끔 칭찬이나 받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분명히 울 아빠 앞에서 장조카와 천자문을 배운 것이 기억나는데 울 아빠의 얼굴 모습이 어떠했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울 아빠에 대한 기대를 잃었기 때문일까? 기억은 잘 안 나도 울 아빠는 분명히 힘이 세고 체구가 컸을 것이다. 부인을 둘씩 두고 자식을 8명이나 낳았으니 말이다.
또 울 아빠는 할아버지로부터 전답을 좀 받은 모양이다. 울 아빠가 벌어서 전답을 장만할 분은 못됐다. 하지만 부자라는 소리를 들었다. 여러 말을 두고 농사를 지었으니 말이다. 500석이라든가 1000석이라든가 알 수는 없지만 공산주의 국가가 된 다음에 지주 반동으로 몰려 평안북도 강계로 강제이주를 당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때 울 아빠는 매우 힘들어했다. 난 울 아빠가 왜 힘들어하는지 몰랐다. 다만 돈 많고 힘센 울 아빠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괜스레 시기하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울 아빠가 불쌍해 보였다.
어느 추운 저녁녘에 울 아빠가 흑색이 돼서 뛰어들어 왔다.
“큰 아이 어디 있니? 언넝 피하라고 해라!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인민군에 들어가야 한다고 난리다. 작은 애도 같이 숨어라!”
큰 형과 작은 형은 뒷들 김치 광으로 만든 작은 굴에 숨었다. 왜 형들이 숨는지 모르겠다. 그냥 인민군에 들어가면 될 것 아닌가? 또 붉은 깃발 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하나같아서 다 함께 잘 살 수 있다고 하지 않는가? 하여간에 울 아빠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난 항상 울 아빠가 하는 일은 모두 옳거니 생각했다. 그래서 형들이 광속에 갇히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그것이 큰 잘 못이었다. 형들이 숨는 바람에 울 아빠가 주재소에 끌려가게 됐고, 한참 만에 나온 울 아빠는 울 아빠가 아니고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성한 데가 한 군데도 없이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간신히 집에 왔다.
울 아빠의 실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형들에게까지 미쳤다. 형들이 잡혀가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울 아빠의 재취 부인인 울 생모의 실수 때문이다. 춥다는 형들의 말에 울 생모는 화로를 광 속에 넣어 주었다. 그 화로 때문에 광 속에서 불이 나 화상을 입고 형들이 뛰쳐나오게 되어 형 모두가 주재소로 잡혀가게 되었다.         
그 이후 형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소식을 알 수 없다. 이런 일을 당하고 보니 울 아빠의 미련한 구석이 끝 간데 없어 보였다. 그때 울 아빠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이렇게 뇌까렸다.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참 한심하다. 지금 이런 소리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몸도 성치 않고 형들마저 죽었는지 살았는지 모르게 된 울 아빠는 개정이 나 월남을 하기로 결정했다. 짜임새 있는 결정도 아니고 욱하는 심에 그냥 월남을 한 것이다. 월남이라고 해야, 창터에서 낭까리골로 선만 넘는 월남이다. 남들처럼 38선을 넘어 저 멀리 남쪽으로 내려가는 것도 아니다. 단지 보기 싫은 사람 얼굴 피하듯 피신하는 월남이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누나들과 장조카와 울 생모와 울 아빠는 다리를 겅중거리며 독점고개를 넘어 나부메, 동산뿌리를 지나 낭까리골로 월남을 했다. 그때 셋째 형은 큰어머니의 외가로 보냈다. 이제는 셋째 형이 장남이 되었으니 장남은 고향에 남아서 조상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어린 셋째 형을 남겨 두었다. 형수는 큰 형의 원수를 갚는다고 장조카를 울 생모에게 맡기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었다.
월남을 하고 며칠 안 돼서 전쟁이 터졌다. 그 날로 울 아빠가 월남한 낭까리골도 인민군 손에 들어갔다. 울 아빠는 또 숨어 살아야 했다. 이제 잡히면 총살이다. 아들 둘을 인민군에 보내지 않기 위해 굴속에 숨긴 기피 가족이고 지주반동으로 강제이주도 하지 않고 월남을 했으니 반동 중에서도 최고 악질 반동이니 말이다. 뭐 울 아빠야 숨어 살면 그만이다. 그 밖의 사람들이 힘들고 고생이다. 그때 난 배고픔의 설움을 알았다. 울 아빠가 미웠다. 난 울 아빠가 밉다고 투정을 부리다 울 생모에게 뒤지게 맞았다. 아무 쓸 짝에 없는 울 아빠를 왜 울 생모는 두둔을 할까?
얼마나 먹고 살기가 힘들었는지 울 생모에게서 난 둘째 딸인 나의 셋째 누나가 부황이 들어 죽었다. 정말로 굶어 죽은 것이다. 그런데도 어느 누구 하나 서러워하지 않았다. 식구 하나 줄었구나 생각했다. 그런 와중에 울 생모가 또 임신을 했다. 숨어 지내는 가운데도 임신을 시키는 울 아빠는 참 대단한 분이시다.
추석이 가까워 오는 때에 국방군이 트럭을 타고 한길을 지나갔다. 국방군이 인민군을 몰아내고 고향을 수복했다고 한다. 누렇게 바랜 울 아빠가 고향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제는 죽어도 고향에서 죽고 살아도 고향에서 살겠다고 한다. 아직도 울 아빠는 전쟁이 무엇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다만 피난 생활이 혹독하고 힘든 생활로만 생각하는 것 같다. 울 아빠는 상황 판단이 아둔한 것 아닌가? 하여간에 월남 생활에서 울 아빠가 한 것이라곤 숨어 지내는 것과 울 생모에게 임신시킨 것뿐이지만 그래도 울 아빠가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집안의 힘이요 기둥이었다.
고향 집에 돌아오니 살림살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인민군이 기거하면서 무너뜨린 흙더미만이 너저분하게 깔려 있었다. 그래도 난 고향집이 좋았다. 천자문을 배우던 마루도 그대로요, 앞마당에 있는 우물도 그대로다. 우물 옆 비스듬히 서 있는 향나무도 그대로다. 그런데 울 아빠의 얼굴은 무겁고 어두웠다.
며칠이 지났는가 싶은데 형수가 장총을 들고 들어왔다. 지금 빨갱이 원수 놈들을 쳐 죽이고 오는 길이란다.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하다. 괜히 잘 못 건드리면 장총으로 내리 갈 길 것만 같다. 형수가 무서웠다. 울 아빠는 소태 씹은 얼굴을 하고는 아무 말이 없었다. 한참 후에 이 한마디를 했다.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어울리는 말인지는 모르나 몹시 속상한 모양이다.
형수는 장조카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울 아빠는 장조카가 어떻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그러나 형수의 위세가 너무 커 시아버지의 권위가 없어 보였다. 울 아빠는 형수가 하는 대로 그냥 놔두었다. 그때 울 아빠가 너무 힘없고 나약해 보였다. 울 아빠의 꿋꿋하고 억센 모습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다.
소문이 들려왔다. 인민군이 고향을 점령하고 있을 때 형수는 송림산 굴속에 숨어 살았다고도 하고 남한 유격대와 연락을 하면서 송림산과 낭까리봉을 넘나들며 인민군을 괴롭혔다고도 한다. 인민군 쪽에서 보았을 때 아주 악질적 미제 앞잡이인 것이다.
또 소문이 들려왔다. 형수가 빨갱이 누구누구를 총 개머리판으로 쳐 죽였다고도 하고 빨갱이 여편네를 흙구덩이에 파묻었다는 소리도 들렸다. 하여간에 형수가 당한 무지막지한 일을 형수가 다시 빨갱이들에게 갚아준 모양이다. 이런 소문에 울 아빠는 아무 말 없이 장조카의 안부만 물었다.
어느 날 갑자기 형수가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들이닥치더니 장조카를 남겨 놓고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중공군이 쳐 내려 온단다. 만약에 공산군이 다시 내려오면 우리 식구는 살아남기 어렵다. 인민군 입대 기피자에다, 월남자에다, 악질 반동 유격대이니 붉은 세상이 되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앞날이 아득하다. 그래서 형수가 왔을 때 울 아빠가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하고 울부짖는가 보다.
정말로 인민군과 중공군이 가까이 왔는지 총소리가 콩 볶는 소리 같고, 대포 소리가 귀밑에서 들렸다. 울 아빠는 고심을 하는 모양이다. 그냥 고향에 남아 죽을 것인가 아니면 피난을 다시 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 같다. 울 아빠는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에게 몰살을 당해 절손이 되느니 피난을 가 새로운 세상을 기약하기로 한 모양이다. 이런 때 보면 울 아빠도 결단력과 추진력이 조금 있어 보인다.
피난을 가려고 식구를 세어보니 누나 둘, 6살 장조카, 5살 나, 만삭의 울 생모, 울 아빠 6식구다. 이제는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피난 짐을 착실히 챙겨야 했다. 울 아빠는 두 바리나 되게 피난 짐을 꾸렸다. 점점 총소리가 가까이 들려오자 피난 갈 사람들이 낭뿌리로 모여들었다.
낭뿌리에 가니 말라가는 물웅덩이에 고기떼 날뛰듯 피난민들이 이리 밀치고 저리 떠밀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서로 먼저 앞서려고 날뛰며, 뭐가 뭔지 모르게 아수라장이었다. 난 울 아빠를 잃어버릴까 걱정이 돼서 울 아빠 바지 꼬리를 잡고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피난길은 무질서하고 걸쭉했다. 배로 피난을 갈 수밖에 없는 낭뿌리인지라 피난길은 더더욱 혼잡하고 무질서해서 마치 빠가사리 날뛰듯 했다.
낭뿌리는 수심이 얇은 관계로 큰 배가 들어오지 못하고 멀리 정박해 있고 조그만 자선이 낭뿌리와 모선 간에 피난민을 실어 날랐다. 자선 하나에 사람 20명 이상은 타지 못했다. 총소리가 가까워질수록 피난민들의 아귀다툼은 더욱 거세졌다. 한참을 기다린 끝에 우리 차례가 왔다. 우리 차례라 하나 다른 피난민들과 더불어 우리 6식구와 두 바리 피난 짐을 한배에 싣고 모선까지 가야 하는 차례다. 울 식구만 타기에도 빡빡한 처지다. 그래서 울 아빠는 우리 식구한테 먼저 5식구가 가고, 다음 배에 피난 짐을 가지고 오겠다고 하면서 우리 5식구가 먼저 가도록 했다. 우린 울 아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다. 한순간의 착각이 운명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뜨리는지 모르겠다.
우리가 탄 자선이 바다 중간쯤 왔을 때다. 낭뿌리에서 큰 섬광이 터지고 낭뿌리 갯 마당에 모래가 하늘로 솟아올랐다. 우리가 탄 배 옆으로 총알이 스치고 지나간다. 난 무서워 머리를 배 밑창에 털어 박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도 울 생모는 울 아빠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여보! 우리는 어떻게 해요? 피난 짐을 버리는 한이 있어도 꼭 나와요!"
우리가 마지막 피난민이다. 그래서 난 울 아빠와 낭뿌리 갯마당에서 생이별을 했다. 우리는 피난짐 하나 없이 아이들과 만삭의 울 생모만이 피난길에 올랐다. 이것이 울 아빠와의 마지막이었다.


                            *        *       *


울 아빠 없는 피난살이는 지옥 생활과 같았다. 목포로 내려 왔다가 무안으로 배치가 됐다. 어려운 피난살이 중에도 울 생모는 내 동생을 출산했다. 내 동생은 죽어서 태어났다. 못 먹고 힘든 피난길에 동생도 어쩔 수 없었나 보다. 죽어 태어난 동생이 가엽기보다는 부러웠다. 난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팔다리는 대나무 같고 배는 맹꽁이 배 같았다. 울 아빠와 같이 있던 낭까리골 월남 때 보다 더 흉했다.
무안에 배치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형수가 왔다. 장조카를 데리고 갔다. 울 아빠가 피난 나오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단지 장조카인 자기 아들 고생시켰다고 강짜만 부리다가 갔다. 이 광경을 울 아빠가 보았으면 어떠했을까? 서시어머니에게 대드는 며느리를 꾸짖었을까? 아니면 장손을 위해 며느리를 두둔했을까? 장조카가 배고프게 산 것도 다 원수 갚는다고 아들은 돌보지 않고 혼자 날뛴 것 때문 아닌가? 제 새끼만 챙기니 괘씸하기가 짝이 없다.
피난 오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형수는 집안의 맏며느리라고 울 생모를 얼마나 업신여겼는지 모른다. 시어머니 대접은 고사하고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맏며느리로 서시어머니를 우습게 보았다. 덩달아 나 또한 서자 취급을 당했다.
형수의 개정이 괘씸하기는 했지만 어려운 피난 생활에 장조카를 데려간다니 고맙고 반가웠다. 한 입을 더는 것이 한결 나았기 때문이다. 한 입 더는 것 자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강짜만 부리지 않고 장조카를 데려갔다면 형수의 지난 허물을 다 씻을 수 있었겠는데 그것을 못 하니 참 안타깝다. 울 아빠가 없으니 형수가 집안의 어른 노릇을 하려고 했다. 울 생모가 불쌍하다.
울 아빠가 있어도 별수 없었겠지만 울 생모는 살기 위해 남의 집 배도 짜고 허드렛일도 하고 먹고 사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했다. 나는 줄기차게 배고프다고 졸라댔다. 졸라댄다고 밥이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무작정 졸라보는 것이다.
울 아빠가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우리 식구를 업신여겼다. 어느 날 면장인지 이장인지 하는 사람이 와서 울 생모에게 개가를 하라고 권했다. 울 생모가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개가는 못 한다고 못을 박았다. 그 날 울 생모는 밤새도록 울었다. 그 이후로 개가를 하라고 추근대는 일이 없었다.
울 생모는 나를 고아원에 보냈다. 도저히 먹여 살릴 수가 없었다. 고아원에 가면 구호품으로 명은 부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1년 가까이 고아원에 있었다. 고아원에서 나올 때, 작은아버지가 찾아 왔고, 전쟁이 끝나 휴전 협정이 맺어졌다. 이제는 영원히 울 아빠를 만날 수 없다. 이제는 남과 북이 휴전선으로 완전히 막혀 버렸다.
작은아버지는 아직도 두루마기에 갓을 쓰고 다녔다. 붓 장사를 한단다. 그러니까 남한 천지의 글방이라 글방은 다 다닌다고 한다. 그렇게 다니다 보니 우리 성의 본인 합천에도 갔단다. 합천에는 우리 성씨가 많이 산다고 하면서 그곳에 가면 식모살이일망정 배는 곯지 않는다고 합천에 가보라고 울 생모에게 권했다.
휴전이 되어 완전히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 앞으로 울 아빠를 만날 수는 없는 일이고, 어쨋든 살아는 가야 하므로 울 생모는 합천으로 가기로 했다. 같은 종씨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합천에 와서는 배고파 울지 않았다.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다고 합천에서 배고픔을 면하고 나니 돈이 필요했다. 나 또한 국민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됐다. 그래서 엄마는 식모살이로 밥을 벌고 누나 둘은 사탕 공장에 나가 돈을 벌어 나를 학교에 보냈다.
합천에서 2년이 지났을 때에 작은아버지가 다시 찾아왔다. 돈을 벌려면 인천 송도를 가면 좋다고 했다. 송도 앞바다에서 조개를 캐면 먹고 살 수도 있고 돈도 벌 수 있다고 했다. 작은아버지가 울 아빠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국민학교 1학년을 마치고 송도로 왔다. 송도에 오니 아직도 전쟁의 잔해가 여기저기 널려 있다. 자유롭게 조개를 캐서 자신의 노력으로 돈을 버니 울 생모는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이제는 남의 구박을 받을 필요도 없고 업신여김을 받을 일이 없다. 내가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형수가 개가를 했다는 소문이 들렸다. 장조카 하나를 잃었다. 아마도 울 아빠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하고 개탄을 했을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죽했으면 형수가 개가를 했을까 동정이 가지만 울 생모를 보면 개가를 해야 꼭 살기 좋은 것은 아닌 것 같다. 여기저기서 혼자 된 여자들이 개가를 했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많은 사람들이 개가를 하는 판이니 형수가 개가했다고 언짢아할 게 아닌 것 같다. 세상이 이처럼 바뀐 것이다. 그래도 울 생모는 조개 캐는 데만 열중이다.
큰 누나, 그러니까 울 아빠 본부인의 첫딸인 큰 누나가 시집을 가게 됐다. 의붓엄마 손에 시집을 가는 것이다. 큰 누나도 불행한 사람이다. 태어나 얼마 안 돼 생모를 잃고 아빠마저 낭뿌리 갯마당에서 생이별을 하고 죽을 고생을 하며 목포, 무안, 합천, 인천 송도까지 와 계모 손에 시집을 가니 얼마나 모진 인생인가. 화려한 결혼은 아니어도 남에게 흉잡히는 결혼은 아니었다.
모질게 살아온 큰 누나의 결혼생활이 좋았어야 했다. 그래야 삶이 평등한 게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매부가 큰 누나보다 한 살 아래다. 매부의 성씨와 큰 누나 생모의 성씨가 같다. 휘돌이 혼인이다. 매부는 미남이고 건장했다. 큰 누나는 미인은 아니나 울 아빠를 닮아 키가 크고 튼튼한 타입이다. 큰 누나의 시집에는 시아버지 시어머니가 다 계시었다. 시집살이일망정 큰 누나는 평생 처음으로 양부모를 모시게 됐다. 인천 석바위에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매부는 작은 성냥공장에 다녔다. 공장에는 처녀 직공들이 많다고 한다. 큰 누나는 집안일과 조금 있는 텃밭 일을 하고 지냈다.
큰 누나가 아이를 둘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매부가 공장 처녀와 눈이 맞아 딴 살림을 차렸다. 그 이후 큰누나는 딸 하나를 더 낳았지만 매부와의 생활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매부가 죽을 때까지 마음에 화병을 가지고 살았다.
난 큰 누나의 이 모든 것이 울 아빠를 닮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여자라면 작고 예쁘장해야지 못생긴 여자라기보다는 키 큰 남자 모습이니 잘생긴 우리 매부가 달가워했겠는가. 하여간에 울 아빠는 큰누나에게까지 힘들게 했다.
큰 누나가 시집을 간 후 우리 식구는 인천 송도에서 서울 삼양동 난민촌으로 왔다. 난민들에게 무상으로 집을 준다는 말에 인천 송도의 조개잡이 생활을 그만두고 대처인 서울로 왔다. 대처라고 서울에 오니 돈을 벌 수가 없다. 송도에서는 바다에 나가 밑천 없이 돈을 벌 수 있었는데 서울에 오니 내 집 한 칸은 생겼지만 장사를 하자면 장사 밑천이 필요했다. 또 장사 수완도 있어야 했다.
울 생모는 새우젓, 엿, 생선 등을 큰 대야에 이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소리를 질러대며 온 동네를 돌아다니는 행상을 했다. 울 생모의 덕분에 난 중학교를 갔다.
내가 중학교에 들어가는 해에 낭뿌리에서 생이별한 울 아빠의 소식을 듣게 됐다. 울 아빠가 살아 계시단다. 어떻게 공산 치하에서 울 아빠가 살아 계실 수 있을까? 이것은 기적이다. 반동 지주에, 월남 가족에, 기피자에, 홀몸인데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겠는가? 도저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하여간에 살아 계시다니 기쁘고 반갑다. 우리 식구는 모두 울 아빠가 죽었을 거라고 믿었다. 특히 울 아빠는 사상적으로 공산주의가 맞지 않고, 혼자 생활을 이겨내지 못하고, 남에게 아쉬운 소리를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혈혈단신 살아갈 수 있었겠는가?
울 아빠의 소식은 이러했다. 피난 나오던 낭뿌리 앞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고향 사람이 이곳 군인에 의해 잡혀 오는 바람에 알게 됐다. 잡혀 온 배에는 우리 먼 친척 되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북한으로 가지 않고 이곳에 남기로 했단다. 그러니까 6년 만에 고향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피난 온 모든 사람들이 고향을 잃고 하루살이에 여념이 없던 때에 어느 날 갑자기 고향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거기다 새로운 고향 소식까지 가지고 와 얘기까지 들려주니 피난 온 모든 사람들이 흥분하고 기대에 차 제정신을 못 차릴 정도였다. 서로 북한에 남은 제 식구들 안부를 물었다.
잡혀 온 먼 친척에 의하면 울 아빠는 새 부인을 또 얻었단다. 맞아! 울 아빠는 여자 없이는 못 살아. 새 부인을 얻었다는 말에 울 생모는 아무 말이 없었다. 난 울화통이 터졌다. 지금까지 우리가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느냐 말이다. 울 아빠야 붉은 세상에서 반동으로 천대는 받았을망정 새 부인 얻어 배급받아 먹으며 편하게 살았을 것 아닌가?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이제는 울 아빠를 잊기로 했다. 만날 수도 없고 만나도 새 부인과 사는데 우리가 낄 처지도 못 되니, 구차하게 끼워 달라고 애걸할 필요도 없다.
둘째 누나, 그러니까 울 생모의 큰딸이 시집을 갔다. 없고 배우지 못한 둘째 누나는 평범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둘째 매부도 중학교만 겨우 나왔다. 둘째 매부는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물건을 운반하는 일을 했다. 나중에 대장간을 차렸다. 힘은 들었지만 제법 돈을 벌었다. 둘째 누나는 아들, 아들과 아들딸 쌍둥이를 낳았다.
어느 더운 여름 대장간 화덕 옆에서 일하던 매부가 간질로 넘어졌다. 눈을 뒤집어 까고 손과 발을 버덜버덜 떨면서 게거품을 물고 나가 자빠져 버렸다. 심한 과로 때문이란다. 피난살이로 고생만 한 둘째 누나의 결혼생활이 처음에는 순탄한 듯했으나 둘째 매부의 간질로 둘째 누나 역시 맘고생을 하게 됐다.
울 생모와 두 누나들의 덕으로 난 착실히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사실인지는 모르나 천자문을 배울 때부터 난 울 아빠를 닮아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모르나 국민학교와 중학교 때는 반에서 3등 안에 들었다. 나는 내 스스로 내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류고등학교 시험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진 것도 울 아빠 때문일까?
고등학교 시험에 떨어지고 나니 난감하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누구 하나 나의 진로에 대해 도와주는 사람이 없다. 울 아빠가 그리웠다. 학교를 포기하는 것이 가장 좋았다. 나가 장사 일을 하면 우리 집안 형편이 좋아질 것 아닌가? 울 생모에게 학교를 포기하겠다고 했다가 뒤지게 맞았다. 사는 데는 돈이 전부가 아니란다. 공부를 많이 해 아는 것이 많아야 된단다.
나는 검정고시 공부를 하기로 했다. 혼자서 죽기 살기로 공부를 했다. 혼자 하는 일이 쉬운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교육이 필요한 모양이다. 1년 혼자 공부하다 검정고시 학원을 갔다. 귀가 솔깃한 이야기를 들었다. 검정고시를 보지 않고도 졸업장을 사서 대학시험을 볼 수 있단다. 그런데 나는 실력이 좋아 공짜로 졸업장을 준단다. 난 그 졸업장을 가지고 3대 명문 중 하나인 일류대학교에 합격을 했다.
대학을 반년 가까이 다니다 가짜 졸업장이 탄로 났다. 신문에도 났다. 입학이 취소됐다. 다시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2년이 지나 명문대학교 의예과에 합격을 했다. 이번에는 정당하게 합격을 했다. 돈 없이 힘들게 의과대학을 다녔다. 의사가 됐다. 울 생모가 좋아했다. 아마 울 아빠도 알았으면 좋아했을 것이다. 서자 취급받던 나도 이젠 큰소리를 칠 수 있게 됐다. 아직도 울 생모는 행상을 다녔다.
의사가 되었으니 개업을 해야지. 하루라도 빨리 돈을 벌어 울 생모를 편안하게 해 주어야지. 날 위해 온 식구가 얼마나 희생을 했는가? 아니 무능한 울 아빠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가? 이제는 이런 희생과 고생에 대해 보상을 해 주어야 한다.
병원 개업을 위해 내장 공사를 하는 날이었다. 공사 일꾼과 같이 일을 하다가 피곤하여 잠시 잠이 든 모양이다. 이때 난 울 아빠 꿈을 꾸었다. 나에게 칭찬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대견스럽게 보는 것 같기도 했지만 무슨 말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울 아빠가 돌아가신 사람들과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살아계시는 작은 아버지와는 달리 돌아가신 큰아버지나 할아버지와 같이 흰 두루마기를 입고 계셨다. 마치 산 사람과는 같이 있을 수 없는 모양 같다. 난 너무 이상해서 울 아빠를 외쳐 부르다 꿈을 깨고 말았다.
울 아빠 꿈은 이번이 처음이고 마지막이다. 잠에서 깬 난 울 아빠가 무슨 계시를 하기 위해 꿈에 현신한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울 아빠가 꿈에 나타났을까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나 짚이는 데가 없다. 아마 울 아빠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리려 꿈에 오신 것 아닌가? 방정맞은 생각 같으나 난 이날 이후부터 울 아빠가 돌아가셨다고 믿었다. 그러나 울 생모는 울 아빠 제사를 지내려 하지 않았다. 정말로 울 아빠가 돌아가셨다면 울 생모는 이렇게 말했으리라.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        *        *

 
병원이 제법 잘 됐다. 나도 장가를 가게 됐다. 난 울 아빠처럼 여러 부인을 두고 싶지 않았다. 지금은 그런 때도 아니다. 주위에선 명문대학교를 나온 의사이니 집안도 좋고 예쁜 여자를 맞아야 한다고 했으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 처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집은 지지리 못 살고, 아빠도 없는 편모슬하이고, 행상을 하는 생모에, 뼈대라고 말할 것은 하나도 없고, 내세우거나 자랑할 것이라고는 삐쩍 마른 몸매에 의사라는 타이틀 하나뿐이다. 그래서 평범한 여자를 아내로 맞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고등학교만 나온 여자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장인이 없는 셈이다. 아마 내 사주에는 아버지라는 명칭이 없는 모양이다. 울 아빠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르고 살았는데 장인마저 없게 됐다. 사주가 어떻든 팔자가 어떻든 아버지라는 말이 그립다.
이제는 울 생모가 행상을 하지 않아도 됐다. 아마도 울 생모의 생애 중 가장 행복한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울 생모가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다. 지난 세월의 찌든 더께를 씻고 싶은 모양이다. 교회에 가서 무엇을 간구하는지 모르겠다.
울 생모의 환갑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울 생모가 울 아빠의 제사를 지내자고 한다. 돌아가신 날을 모르니 울 아빠의 생일날에 제사를 지내잔다. 교회에 나가면서 왜 울 아빠의 제사를 지내자는 지 모르겠다. 울 생모도 나처럼 꿈에 울 아빠가 나타나서 돌아가신 것을 알려 주었을까? 그래서 그 이후 울 아빠의 제삿날은 울 아빠의 생일날이다.
나도 아들과 딸을 낳았다. 울 생모는 내 아내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내 아내에게 수고했다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정말로 기뻐했다. 손자가 좋은 모양이다. 울 아빠도 날 낳았을 때 좋아했을까? 난 이때 생각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울 아빠가 날 좋아했는지는 모르나 지금 나는 울 아빠를 좋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내 자식이 먼 훗날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내가 울 아빠를 생각하는 것처럼 내 자식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은근히 걱정이 된다.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이 되풀이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
박사학위를 받았다. 울 생모가 좋아 어쩔 줄 몰라 했다. 울 생모는 살아생전에 이처럼 좋은 때를 만나리라고 생각 못 한 모양이다. 평생 고생만 하다가 죽을 줄 알았단다. 이제는 바랄 것이 없단다. 지난 고생이 눈 녹듯이 사라진단다.
울 생모에게 치매가 왔다. 자꾸만 울고 계신다. 울 아빠가 불쌍하단다. 그래서 눈물이 난단다. 당신은 지금 행복해 죽겠는데 울 아빠는 고생만 하고 있단다. 그러니 슬프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참 울 생모는 배알도 없는 모양이다. 울 아빠 때문에 그렇게 고생을 하고 모질게 살아왔는데도 뭐가 그리도 울 아빠가 그립고 불쌍하단 말인가. 이게 부부간의 정인가? 에이 이 모진 정아!
울 생모는 울면서 돌아가셨다. 울면서 돌아가셨어도 울 아빠를 불쌍히 여기고 울 아빠의 잘못을 용서하면서 돌아가셨다. 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울 아빠는 참 염치도 없는 사람이다. 당신은 하고 싶은 데로 살아왔는데도 당신의 아내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되돌려 주니 말이다. 울 아빠는 여복이 있는 걸까?
하긴 울 아빠가 울 생모의 용서와 사랑을 알 리가 없으니 아무리 울 생모가 울고 울면서 사랑과 용서를 주어도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울 아빠는 복 받은 사람이다.
나도 장년이 됐다. 병원이 잘 돼 못사는 이웃을 생각할 정도가 됐다. 고생의 멍에가 얼마나 힘들고 배고픔의 대물림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아는 나는 다시는 이 세상에 이런 멍에와 비참함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작은 힘을 보태려고 했다.
IMF가 닥쳐와 길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흘렀다. 먹고 살 집을 하루아침에 날려 버리고 거리로 나앉은 사람들이다. 내가 피난 나올 때와 같다. 이들은 나의 옛 모습이고 나다. 이들을 돕고 싶다. 아니 이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나를 돕는 것이다. 옛날에 다른 사람이 나를 돕기 힘들었듯이 나도 이들을 돕기가 어려웠다. 이들은 마음의 병까지 가지고 있었다. 만나는 노숙자마다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하고 뇌까리었다.
서울역에 나가 "밥 퍼"를 했다. 아픈 이에게 주사를 놓았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닌데 왜 이리 많은 사람들이 굶고 집을 잃고 길거리로 나왔는지 모르겠다. 정치하는 놈들이 잘못해서 그렇다. 죽일 놈의 정치꾼들 같으니라고!
찬 지하철 바닥에 누워있는 저 노숙자들이 나의 어린 시절과 겹치면서 눈에 눈물이 났다. 난 그때 오직 배고픔만 해결하고자 했다. 희망도 없었다. 지금 저 노숙자들도 희망이 없을까?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된다. 난 그때 희망이 없는 가운데도 울 아빠를 잊지 않았다. 그것이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 같다.
나의 아들이 판사가 됐다. 난 아들을 데리고 울 생모의 산소로 갔다. 울 생모에게 자랑을 했다. 당신의 손자가 판사가 됐어요. 만약 울 아빠와 같이 있으면 당신의 손자를 자랑해 주세요. 당신의 손자가 판사가 돼서 억울하고 힘들고 모질게 사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다고요. 또 자랑을 했다. 당신의 손녀딸이 명문여자대학교에 갔어요. 앞으로 훌륭한 신부가 될 거예요.
햇볕정책으로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오고 갔다. 나도 피난 나온 지 꼭 50년만인 2002년 5월 15일에 평양에 갔다. 북한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초청장을 받았다.
 "한민족복지재단 앞.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경제협력련합회는 경제협력사업을 협의하기 위하여 귀 대표단이 편리한 시기에 공화국을 방문하도록 초청합니다. 련합회는 해당 기관이 공화국 체류 기간 모든 편의를 제공하며 신변 안전과 무사 귀환을 보장한다는 것을 알리는 바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민족경제협력련합회. 주체91(2002)년 5월 11일"
북경을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 평양! 평양! 평양! 울 아빠가 있는 곳! 꿈에서도 가보고 싶은 곳! 울 생모를 울면서 돌아가게 한 곳! 1시간이면 가는 것을 50년이나 기다리게 한 곳! 살아서는 못 가볼 것만 같았던 곳!
마음의 응어리가 가슴에 뭉쳐 꽉 메인 듯하다. 평양에 도착하고 보니 울 아빠, 울 생모, 큰형님, 큰 누나, 작은 누나, 형수 등 집안 식구 모두가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하고 울부짖는 듯하다.
평양 순안공항에 내려 땅을 치며 울고 싶다. 울 아빠가 미워서. 울 아빠의 어리석음이 미워서. 아니 울 아빠가 그리워서. 울 아빠가 보고 싶어서. 아니 울 아빠의 품에 안기고 싶어서.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는 말이 있지만 평양의 모습은 산천도 간 곳 없고 인걸도 간 곳이 없는 듯하다. 거리마다 건물마다에는 생소한 표어들이 붉게 걸려 있고 사람들은 우중충하고 시내는 을씨년스럽다.
난 슬펐다. 울 아빠가 있는 곳이 화려하고 풍요로우며 향기와 기름이 넘치는 곳이기를 바랬다. 기대에는 못 미쳐도 언저리는 갔어야 했다. 벅찬 가슴과 기대에 찬 꿈과 바람이 사라지는 순간 울 아빠가 불쌍하고 울 아빠의 지난 세월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짐작이 됐다.
내 동생이라는 사람이 고려호텔로 찾아 왔다. 울 아빠의 셋째 부인으로부터 난 아들이다. 난 무의식중에 동생의 얼굴에서 울 아빠의 모습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울 아빠와는 달리 키는 작고, 얼굴은 새까맣게 탔고 체구는 말라 있었다. 군인 냄새가 났다. 어느 구석에서도 울 아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으나, “형님”하고 달려드는 모습에서 이게 혈육의 정이란 말인가?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동생을 만났어도 동생인지 아닌지를 챙겨야 하는 세상이 싫다. 동생이 나를 보고 "형님" 하는데도 나는 "야 이놈아"하고 덥석 잡아 주지 못하는 세상이 싫다. 이런 세상에 왜 울 아빠가 살아, 나에게 배다른 동생을 만나게 하는지 모르겠다. 좋은 환상과 즐거운 기억만 갖고 싶었는데 낙원의 꽃동네는 어디로 가고 배고픈 민중과 헐벗은 인민만이 있단 말인가.
동생 말에 의하면 울 아빠는 내가 꿈꾸던 때에 돌아가신 것 같다. 울 아빠도 돌아가시면서 나를 잊지 못하셨던 모양이다. 울 아빠의 삶은 힘든 삶이었단다. 그래도 울 아빠는 동생에게 곧고 바르게 살라고 했단다.
동생은 해주 1중학교를 나와 해주 정치대학을 졸업하고 군관으로 군에 들어가 지금은 좌급 군관인 상좌로 남한의 대령과 같은 계급이란다. 울 아빠의 외골수와는 달리 동생은 시류에 잘 적응해 북한 사회에서는 모두 부러워하는 상좌 군관으로 성공한 모양이다. 울 아빠와 동생을 놓고 보았을 때 누가 잘한 것인지 모르겠다. 세상이 이 두 사람을 달리 만든 것 아닌가?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
울 아빠가 울 생모와 헤어지듯 동생과 나도 헤어졌다. 나는 동생과 헤지면서 울지 않았다. 동생도 울지 않았다. 언제 만나자는 약속도 없었다. 참 못된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 나와 동생이 생겨나, 울 아빠를 똑같이 아빠라고 부르면서, 언제 다시 만날지도 모르고 헤어지면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세상이 정말 싫다.
평양을 갔다 온 지도 벌써 5년이 지났다. 요사이 난 금강산 온정리 제1인민병원에 1주일에 한 번씩 진료를 간다. 북한을 돕고 싶다. 북한이 어렵게 살아서가 아니라, 동생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여간에 북한을 도우면 나의 헛헛한 마음이 채워지는 듯하고 알싸하고 알알한 헌데가 아무는 듯하다.
아무튼 "에이! 빌어먹을 놈의 세상!"이 다시는 오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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