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4 13:00 (수)
“치아를 살리는 치과의사 되렵니다”
“치아를 살리는 치과의사 되렵니다”
  • 김정교 기자
  • 승인 2019.02.16 14:2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해외에 6개 치과 진료소 설립한 공윤수 원장 “10개 더 만들 것”
이동 진료용 포터블 치과장비 개발, 콩고 치과의사에 주어 성과
‘꿈이 있는 사람들’ 설립… 열치·심평원 등과 협력해 더 큰 봉사
공윤수 원장
공윤수 원장

2000년부터 2008년까지 8년 동안 필리핀에서 선교사역을 하면서 치대를 졸업하고, 그 어렵다는 예비시험을 통과해 한국 치과의사가 된 사람.

2009년 서울 석관동에 치과 문을 열어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진료를 도맡아 온 사람. 2013년부터 해외에 치과 진료소를 설립하기 시작해 지금까지 6곳을 만들고, 앞으로도 계속하겠다는 사람.

보통의 치과의사라면 쉽지 않은 일을 자청하는 공윤수 원장(미보치과)을 덴탈이슈가 만났다. <편집자 주>

- 처음 제보를 받고 많이 궁금했다. 치과의사로서 편하게 살 수도 있을 텐데, 고생을 사서 하는 이유는.

“고향이 대구인데, 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정말로 가난하게 자랐다. 어렵게 살면서 전문대부터 대학, 대학원을 고학으로 졸업했다.

지금은 치과의사로 엄청난 비용을 들이면서 굵직굵직한 봉사를 이어가니까 사람들은 처가나 제 본가가 엄청난 부자인 줄 안다.

20대 중반에 군에 있을 때 보직이 시체 염을 하고, 망자를 보내는 일이었다. 시신을 닦으며 ‘사람이 빈손으로 왔다가 갈 때도 빈손’이라는 생각을 수도 없이 반복했다. ‘어떻게 살까’를 매일 고민했고, 그러면서 제가 세상 뜰 때 ‘아, 참 아깝다, 참 열심히 산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2000년 12월부터 2008년 5월까지 필리핀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현지 치과대학을 졸업했다. 필리핀 사람들이 돈이 없어 치과 치료를 제대로 못 받는 것을 보면서 이들에게 의료봉사가 절실했기 때문이다.”

진료봉사를 하는 공윤수 원장.
진료봉사를 하는 공윤수 원장.

- 필리핀 선교사역이 힘들었나. 귀국한 이유와 그다음 활동은.

“아니다. 몸은 힘들었어도 보람과 감사의 나날이었다. 필리핀에는 약사인 아내, 신애순 선교사가 마련한 돈으로 갔다. 그런데, 그곳의 어려운 사람들이 하루 1달러만 있으면 굶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이것저것 계속 주다 보니 한국에서 가져간 돈이 바닥났다. 결국 귀국을 하게 됐는데, 마지막으로 남은 것이 저와 아내의 비행기 표 한 장씩이었다.

한국에 돌아와서 공부를 먼저 했다. 치과의사 국시를 준비했고, 예비시험에 어렵게 합격한 뒤 한림대 박준우·최동주 교수 문하에서 박사과정을 하며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박사 이후에도 여러 교수님이나 원장님과 스터디그룹을 한 것이 임상에 큰 도움이 됐다.

2009년 석관동에 미보치과를 개원하고 본격적인 국내 의료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 지역에도 무의탁 노인과 소년소녀가장, 한 부모 가정, 차상위계층, 외국인노동자, 장애인 등 복지 사각지대에 처한 분들이 많아서 이들에게 유·무료로 진료 봉사를 하고 있다. 성북구청과 동사무소, 장애인복지관 등 관내 기관들의 협조를 받아 대상자를 정한다.

특히 주말과 공휴일에는 재가 중증장애인 등을 찾아가 구강검진과 필요한 진료를 한다. 주말에는 2~3곳을 방문하는데, 그래서 개원한 뒤 지금까지 쉰 날이 없다.”

1호 치과 진료소를 설명하는 공윤수 원장.
1호 치과 진료소를 설명하는 공윤수 원장.

- 해외 치과 진료소를 설치하는 등 봉사를 계속한다고 들었다. 국내만으로도 벅찰 텐데 계속하는 이유는.

“필리핀에서 진료하면서 약이나 재료가 없어 발치만 해주고 끝낸 환자가 많았고, 그것이 귀국하면서 마음에 걸리고 미안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앞으로는 치아를 살리는 치과의사가 되자’고 결심했다.

제가 필리핀에서 발치한 치아 개수를 생각해보니, 치과 진료소 10개 정도를 만들면 그동안 뺀 치아 수 만큼 살려줄 수 있겠더라. 그래서 2009년 치과를 오픈한 뒤 2013년 첫 해외 치과 진료소 설립을 시작해 6개 병원을 설립했다.”

- 지금까지 설립한 해외 치과 진료소는 어디인가.

“2013년 필리핀에서 활동하는 ‘소록유니재단(대표 장재중)’과 협력해 마닐라 북쪽 깔라오깐市 한센인 마을인 사마리아 빌리지에 첫 치과 진료소를 설립했다. 소외된 한센인의 치아 관리와 주변의 가난한 마을주민에게 의료혜택을 제공함으로써 해외 치과 진료소 세우기에 첫발을 내디뎠다.

두 번째는 아프리카 가나 테마市 WAM 센터와 협력해 세웠고, 캄보디아 깜뽕스프 지역에 제3호 치과 진료소를 설립했다. 제4호 치과 진료소는 필리핀 ‘소록유니재단’과 다시 손을 잡고 샌안토니아시의 정부가 운영하는 보건소 내부에 설치했다. 5호는 캄보디아 덤락텀에 설립했으며, 6호는 필리핀 판디 지역에 세웠다.”

사마리아 빌리지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사마리아 빌리지 사람들이 자리를 함께 하고 있다.

- 앞으로도 해외 치과 진료소를 계속 설립할 것인지.

“물론이다. 그런데 지금은 방향을 조금 바꿔 포터블 치과장비를 활용해 진료할 수 있도록 ‘이동식 치과 진료소’를 추진하고 있다. 현지 사정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경제가 어려운 나라일수록 교통도 불편하고 주민도 흩어져 있다. 따라서 환자가 진료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진료소가 환자를 직접 찾아가도록 하자는 것이다.

비용면에서도 유리하다. 고정식 진료소를 세우려면 우리가 장비를 리폼해서 세팅하는 비용은 차치하고도 물류비용만 2000~3000만 원이 들어가는 데다 병원도 25평 이상 돼야 하므로 1억 원 정도 잡아야 한다. 또 장비가 고장 나면 수리도 문제가 되므로 진료 효율성도 떨어진다.

공윤수 원장의 포터블 치과진료kit. 컴프레셔가 내장된 올인원 시스팀으로 18Kg에 기내 수납이 가능한 초소형이다.
공윤수 원장의 포터블 치과진료kit. 컴프레셔가 내장된 올인원 시스팀으로 18Kg에 기내 수납이 가능한 초소형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먼저 포터블 장비를 새롭게 개발했다. 무게와 부피를 줄여 기내 탑재가 가능토록 했는데, 포터블 치과 장비 1대 800만 원, 소독기 1대 400만 원, 기타 기초장비 1식 800만 원으로 1세트에 2000만 원이다. 장비 1세트에 물류비용만큼도 들지 않는 것이다.

이동식 진료 프로젝트를 위해 작년 7월에 아프리카 콩고 치과의사를 불러 2주 동안 치과 임상의 기본부터 임플란트까지 포터블 장비를 이용해 교육했다. 이 콩고 치과의사에게 이동식 장비를 세팅해 비행기에 태워 보냈더니 차에 장착할 수도 있고 너무 좋았다. 건물이 필요 없고 효율적이라 앞으로 많이 활용하려 한다.”

- 혼자서 하기에 힘들지 않은가. 물적 지원을 받는 곳이 있는지.

“제가 다니는 교회에서 ‘꿈이 있는 사람들(꿈사)’이라는 선교단체를 만들었다. 제가 이곳의 대표를 맡고 있고, 이곳을 통해 국내외 모든 봉사 계획이 수립되고 또 진행된다.

해외 치과진료소에는 현지 의사가 고용돼 있고, 진료비용 등은 ‘꿈사’에서 지원한다. 해마다 봉사 팀이 현지에 가서 진료 지원을 한다. 2018년 하계 봉사는 필리핀 블라칸 판디에서 건강보험심사평가원과 한국보건정보정책연구원이 협력해 연합으로 진행했다.

최근에는 열린치과봉사회와도 코웍을 시작했다. 열치는 지난 설날 명절 연휴를 이용해 2월 1일부터 필리핀 진료 봉사를 하고 왔는데, 현지에서 본을 떠오면 치아를 만들어 주는 등 협력하고 있다.

올해는 요르단에 병원을 설립할 계획이다. 그쪽에서 의사 등 인력을 지원하고, 필요 재정의 97%는 제가 지원한다. 돈 버는 것을 모두 거기에 사용하는데, 저나 아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감사한다.”

사족(蛇足)= 그동안 크고 작은 수상을 사양해 왔으나 봉사에 참여할 사람에게 알리기 위해 2015년 △서울시 봉사상 개인 부분 대상과 △위대한 한국인 100인 대상을 받은 공윤수 원장은 “처음 제가 하는 활동을 보고 주변에서 ‘정치하려 한다’고 했지만 저는 지금도, 앞으로도 정치에는 뜻이 없다”며 크게 웃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