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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의학에세이[14] 현대의학의 발자취를 따라서
김영진 의학에세이[14] 현대의학의 발자취를 따라서
  • 김영진 고려대 의료법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치의학박사
  • 승인 2020.05.31 22: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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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현대의학으로의 발전
김영진 박사
김영진 박사

1876년(고종 13년)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수신사로 일본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일본인 의사 ‘오다키(大瀧富川)’로부터 종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이란 책을 얻어다가 지석영에게 전해 주었다.

그 뒤 1879년 ‘지석영’은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와 종두침 두 개를 구해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시행된 최초의 종두이다. 그러나 두묘의 공급이 잘 안 되었으므로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 일본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 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의 사양법(飼養法) 채장법(採漿法) 등을 배운 뒤 두묘 50병(柄)을 구해가지고 귀국하였다.

그리고 서울에서 두묘를 직접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일본인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1885년 지석영은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신설(牛痘新說)’이란 책을 저술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온 우두법에 관한 저서로 상하 모두 2권으로 되어 있었다. 내용으로는 ‘제너’의 우두법 창시를 비롯하여 그의 면역학적 이론과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이나 채장법 등이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었다.

그 후 조선 정부에서는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우두를 전국적으로 보급하도록 법으로 규정하고 조선위생국에서 이를 관장하였다.

인류 최후의 천연두 환자로 기록된 방글라데시의 ‘라히마 라누라(1975년, 당시 3세)’
인류 최후의 천연두 환자로 기록된 방글라데시의 ‘라히마 라누라(1975년, 당시 3세)’

한편, 서양에서는 17세기 초 갈릴레오 갈릴레이에 의하여 최초의 현미경이 고안되고 안경사 ‘한스 얀센’과 그의 아들 ‘자카리랴스 얀센’에 의하여 복식 현미경이 발명될 때까지 세균은 전혀 인류의 눈에 띄지 않았으므로 그 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았다. 그리고 현미경을 통하여 그 존재가 발견된 후 200년이 지나도록 세균과 질병과의 관계가 명확히 규명되지 못했다.

1860년대에 이르러 미생물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파스퇴르’는 프랑스산 포도주나 맥주가 변패하여 질이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연구를 하던 중 그러한 변패의 원인이 잡균의 혼입으로 유발된다는 사실을 현미경 관찰을 통해 밝혀냈다.

그는 이에 바탕을 두고 1864년에 사람이나 동물의 질병 중 특정한 질환은 세균의 침입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뒤이어 독일의 ‘코흐’는 탄저병의 병원균을 발견하고 다른 전염병에도 각각의 특이한 병원균이 존재함을 알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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