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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재 신작소설(1)] '땅과 바다의 어름'
[신덕재 신작소설(1)] '땅과 바다의 어름'
  • 신덕재 중앙치과 원장
  • 승인 2018.08.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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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재 원장
신덕재 원장

덴탈이슈는 치과계 봉사자이자 펜클럽 회원으로서 문인으로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신덕재 중앙치과원장의 신작소설 5편을 연재한다.

신 원장은 이번에 게재하는 작품들을 묶어 오는 가을에 소설집을 낼 예정이다.

덴탈이슈 편집위원이기도 한 신 원장의 신작 소설을 통해 무더위를 피하시기 바란다. [편집자 주]

 

 

 

 “재복아! 갯바당에 안가면 낭구나 해 오라우야!”
 홑창 같은 벽을 사이에 두고 안악댁의 질정(質定)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보름 때면 찾아오는 보름치의 매서운 추위로 냉골이 다 된 방바닥에 골판지처럼 딱딱한 이불을 뒤집어쓴 그는 안악댁의 소리가 성마르긴 해도 자식에 대한 깊은 열정과 강한 욕구와 삶의 끈끈함을 나타내는 소리로 들렸다.
지금 그녀의 속마음은 재복이가 정말로 나무를 해 오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학교는 고사하고 성경 구락부라도 다닐 수 있게 되고, 청량산 꼭대기에서 내리지르고 송도 앞바다에서 치켜 지르는 매서운 된바람을 막을 따듯한 옷과 허기진 배를 채워 주고 싶은 소박한 모정의 욕구라 생각됐다.
  “백장 놈의 새색기들은 할 일 없이 갯뱅장에다 지름을 들어부을 일이 어데메 있단 말이야. 비러먹을 놈들 같으니라구.
 소리개(松峴里) 아자씨!
 오날도 조반 안 드실 작정이왜까? 장창 자빠져 잠만 자면 어드러케 하갔시요. 몸도 성치 아느맨서 끼니를 거르면 되갔시까?
 아자씨, 빨리 오시라요. 진장짠지를 새로 내왔으니 먹어 보시라요. 날이 차서 짠지 맛이 제대로 나느만요.”
 안악댁의 기름 얘기를 듣고 그는 보름 넘게 조개를 잡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군용기름을 실은 유조선이 겨울바람에 좌초가 되어 송도 앞바다를 검게 물들였던 것이다.
 해안선을 따라 세 치 두께로 덮여 있는 기름을 퍼내느라고 동네 고샅마다 때아닌 소동이 벌어졌다.
 예기치 않았던 이 기름은 궁핍한 피난 생활에 횡재였으며 생각지도 않았던 수지였다. 그러나 그것은 추운 날 발등에 오줌을 싸는 어리석음이었고 소탐(小貪)에 즐거워하는 우둔함이었다.
 인천 상륙 작전 때 비 오듯 퍼부어 댄 함포 사격은 이름 그대로 깨끗하고 맑으며 조용한 청량산을 초토화시켜 너덜겅만이 있는 민둥산으로 만들고 말았다.
 날물이 되었을 때 송도 앞바다의 갯벌은 기름 때문에 청량산처럼 처참하게 되었다.
 갯벌에 흔하게 깔려 있던 칙게는 시커먼 기름을 뒤집어쓰고 눈망울을 허우적거리며 긴 다리를 버둥대고 있었다.
 칙게 구멍마다에는 기름띠가 덮여서 무지개 빛깔의 피막이 형성되어 있다. 원폭(原爆)의 폭풍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쓸어 없애고 계속적으로 고사시키듯이 기름띠도 송도 앞바다의 모든 생명체를 죽이고 송도 사람들의 생활 터전을 앗아갔다.
 기름의 독성을 생각하다 그는 들 물때마다 검은 성엣장과 함께 밀려오던 망둥이, 밴댕이, 숭어, 전어 등 죽은 물고기 떼의 상한 냄새로 속이 매식거리고 목울대가 울컥 추켜올려지는 것을 느꼈다.
 “날래 오시라는데 와 이래 지체 하는거 왜까? 밥은 떠뜻할 제 먹어야 살루가는 법이 야요. 빨리 어서 건너 오시라요.”
 안악댁의 성화가 전과 다름없다. 그는 굼벵이처럼 이불을 빠져 나와 두 손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두어 번 쓸어 올렸다.
 보름치에는 날씨가 맑고 매서운 법인데 오늘 아침은 잠록한 게 눈이 올 것만 같다. 이런 날이면 더욱더 도지는 다리의 통증을 무딘 감각으로 느끼며 그는 안악댁의 방문을 열었다.
 재복이는 벌써 아침을 먹고 나갔는지 없었다.
 그는 면구한 생각에 몸을 움츠린 채 앉은걸음으로 상머리로 갔다. 그녀의 말대로 김장김치의 맛이 날씨에 걸맞게 시원하여 입안 전체에 감친다.
 포기김치가 아니고 무와 배추를 함께 썰어 새우젓에 버무린 짠지였지만 새콤하고 산뜻한 맛이 일품이다.
 “저놈의 지름배는 언제 없어진답네까? 어서 없어져야 갯바당에 나가 조개를 캐던가 말던가 할 것 아니갔시요.
 저놈이 저러케 버티고 있으니 돈꽁댕이를 맨질 수가 있어야지요. 이제는 보리쌀도 매칠 안 남았는데 어드러케 살란 말인지 도무지 모르갔시요.
 에이 쌍놈의 양코뱅이 새색기들이라구!”
 그는 안악댁의 험구를 한 귀로 흘리며 엉거주춤 일어나 낫을 들고 밖으로 나왔다.
 잠포록한 하늘에는 검은 구름이 차츰 퍼져서 아동 그려지기 시작했다. 서리병아리 같은 그는 추레해 보이는 군인 방한복을 입고 손을 뒤로 깍지 끼고서 힘없이 청량산으로 향했다.
 돌들이 사방으로 흩뜨려진 비탈에는 나무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어쩌다 남은 소나무도 옆 가지는 하나도 없고 무당집 솟대 모양 꼭대기에 솔가지 하나가 달랑 붙어 있을 뿐이다.
 그러니 삭정이와 솔가리는 말할 필요도 없다.
 이제는 몇 안 되는 소나무 밑둥을 쳐서 땔감을 하는 수밖에 없다. 그는 낫을 몇 바퀴 돌리다가 밑둥만은 자를 수가 없어서 나무하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할 일 없이 그는 바위에 걸터앉아 별장을 내려다보았다.
 별장은 왜정시대에 일본 사람들이 청량산 중턱에 지은 집으로 지금은 피난민들이 벌집 모양으로 방 하나씩을 차지하고 사는 곳이다. 전쟁으로 인해 퇴락은 하였어도 집 없는 피난민들에게는 둘도 없는 안식처이다. 그러나 피난민들이 우글대던 그 당시에 방 하나 차지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다행히 그는 다리 덕분에 안악댁의 옆방 하나를 차지할 수 있었다.
 그는 옹진 지구에서 빨갱이들을 때려잡는 군번 없는 유격대였다.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다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인천 앞바다에 있는 병원선에서 치료를 받았다. 휴전이 되고, 병원선이 철수하는 바람에 그는 사이비 상이용사가 되었다.
유격대 생활을 할 때 그는 이렇게 믿었다. -전쟁에서는 자연의 파괴와 인간성의 말살이 필연적이고 당연한 행위라고- 그러나 그가 다리에 총상을 입고 휴전이 되어 자연인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지난 과거가 얼마나 어리석고 우매하였는가를 깨달았다.
 옳다고 생각하며 파괴한 산하는 이제는 그에게 굶주림과 헐벗음을 갖다 주었고 정의를 위해 행한 그의 살상은 그에게 불구자의 고통을 안겨다 주었다.
 전쟁의 피해를 생각하다가 아직까지도 아무런 손상을 입지 않고 고고히 서 있는 장고개의 큰 소나무를 생각해 냈다.
 그래, 전쟁이 모든 자연과 인간을 파괴하고 말살한다 하더라도 이를 이기고 살아남는 것이 있다.
 바로 이 큰 소나무가 초연(炒煙)의 포화 속에서 모든 것이 죽어가고 사라져가도 살아남아 전쟁의 허구성과 잔인함을 고발하고 있다.
 이 큰 소나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우연한 행운이 아니고, 땅속 깊숙이 박혀 있는 뿌리의 근원에서부터 솔잎 끝까지 이어지는 자생의 힘에 의한 것이다.
 이는 삶의 정수이며 자연의 섭리다.
 여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벌떡 일어나 장고개의 큰 소나무로 향했다.
 큰 소나무는 정이품 소나무의 기품과 당 나무로서의 자태가 함께 어우러진 소나무이다.
 밑 둥 아름은 두 팔이 넘고 세자 높이에 두 가지가 나 있어 한 가지는 수평으로 뻗어 땅 너머 바다를 향하고 있고, 다른 가지는 40도 각도로 비스듬히 청량산 너덜겅을 향해 있다.
 멀리서 보는 큰 소나무의 모양은 지체 높은 선비가 수십 년 동안 정성 들여 다듬은 비낀 줄기와 문인목줄기가 함께 어우러진 소반 위의 분재와 같다.
 그는 큰 소나무 밑 바위에 걸터앉아 재복이가 언젠가 양키로부터 얻었다고 하면서 그에게 준 낙타 그림이 그려 있는 카멜 담배를 방한복 위 주머니에서 꺼내 물었다.
 카멜 담배는 담배를 빨 때 봉초 담배보다 담배 티가 입속으로 들어오지 않아서 좋았다. 순하긴 해도 봉초처럼 구수하고 향긋한 카멜 담배를 한 모금 빨아 내 뿜었다.
 그 연기 너머로 오 단장네 쓰레기장이 보였다.
 서북 청년단 단장이었다고 떠벌이는 오 단장은 깜둥이 부대의 쓰레기장과 부모 잃은 아이들의 모둠자리인 고아원을 운영하고 있다.
 쓰레기장에는 이상한 냄새가 있다.
 뭐가 썩는 냄새 같으나 우리네 두엄 냄새가 아니고, 시큼한 냄새 같은데 우리네의 김치 냄새도 아니다. 쾌쾌한 냄새 같으나 우리네의 새우젓이나 황새기 젓 냄새도 아니다. 아마도 그 냄새는 우리네에 없는 색다른 냄새다.
 그리고 쓰레기장에는 꿀꿀이죽이 있다.
 무미하고 담백하나 입속에 들어가 침과 몇 바퀴 어우러지면 달고 고소한 감칠맛이 나는 우리네 흰죽과는 달리 꿀꿀이죽은 시큼한 듯하면서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듯하면서 떫은맛이 입속에 배는 이상한 음식이다.
 그리고 또 쓰레기장에는 경비 보는 아저씨가 있다.
 사람들이 그를 피똥 싸는 아저씨라고 부른다. 정말로 경비 아저씨가 피똥을 싸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네에 없는 냄새와 먼지 속에서 양코뱅이들이 먹다 버린 찌꺼기인 꿀꿀이죽을 먹으며 사는 그가 숨이 넘어갈 듯이 기침을 하고 비칠비칠 걷는 모습을 보면 정말로 피똥 싸는 아저씨로 볼 수밖에 없다.
 잠록하던 날씨가 검기울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눈앞 고섶이 안 보일 정도로 세차게 눈이 휘날렸다.
 꾸부정한 자세로 다리를 절면서 그는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그가 꿀꿀이죽 한 깡통을 얻어 들고 별장 고샅 어귀에 들어서니 안악댁의 고함 소리가 질펀했다.
 “이 몹쓸 놈의 아새색기가 사람이 될라고 하는 긴가 안 될라고 하는 긴가 !
 하라는 공부는 안하고 총알은 어데메 써 먹을라고 줘 오는 기가, 줘 오기를!
 국을 끓여 먹을래? 죽을 쑤어 먹을래?!
 어데메 말을 해 보라우야, 이 아새색기야 !
 당최, 될 아새색기는 떵닢부터 알아본다고 했는데 이놈의 아새색기는 떵닢 부터 노라니 어드러케 하면 되갔는지 모르갔서 !
 너, 앤종일 뭐하고 돌아다녔냐?
 총알은 줘 오지 말라고 얼마나 일렀냐, 일르기를!
 이러케 에미 말 안 듣다가 에미 복창 터져 뒤지면 너 아새색기 어드러케 할 판이냐?! 에비가 있냐 한점 피부치가 있냐? 이 세상에 네놈하고 나 말고 누가 있냐? 냄들처럼 먹을게 만으냐 입을게 만냐?
 어쩌자구 쟁신 머리 못 차리고 돌아다니냐, 다니기를!
 쟁신 똑바로 차려도 살까 말까 한 판에 쟁신 못 차리면 뒤져야지 살아서 뭐하갔서?
 쟁신 차리 갔냐?!! 못 차리 갔냐?!!
 내가 저 아새색기 못 되는 꼴 보기 전에 콱 뒤져야지 살아서 뭐 하갔서.
 아이고, 이놈에 팔자야. 내 팔자에 무슨 복이 있어서 새끼 복을 타고 났갔서. 지지리도 복도 없는 년이지!”
 그는 꿀꿀이죽을 부뚜막에 소리 없이 놓고 방으로 들어가 눈 맞은 군용 방한복을 벗을 생각도 않고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조금이라도 체온을 아끼려고 다리를 모아 두 손으로 감싸 안았다. 방바닥 냉기와는 달리 두 다리 사이로 체온의 따듯함이 느껴졌다.
 이(蝨)도 몸의 온기를 맛보았는지 극성스럽게 스멀거리기 시작했다. 이(蝨)의 맹렬함만큼이나 재복에 대한 안악댁의 울분도 컸다. 그는 이의 스멀거림과 가려움증을 잊으려고 그녀의 지난 일들을 주섬주섬 더듬어 봤다.
 -재령평야의 곡창인 안악에 부잣집 며느리로 시집 왔다지.
 -공산 치하가 되자 지주 반동으로 몰려 하루아침에 콩가루 집안이 되었다지.
 -재산 몰수와 강제 이주 때문에 옹진의 검은머리(黑頭里)로 월남을 했다지.
 -사변이 나자 남편은 인민군으로 끌려가 생사를 모른다지.
 -1.4후퇴 때 빨갱이 세상에서는 살 수가 없어서 아구리선(口開船)을 타고 피난을 나왔다지.
 그는 비몽사몽 간에 가물가물 이어져 가는 그녀의 지난 일들을 더듬어 가는데 갑자기 안악댁의 악 다구리 같은 소리가 귓가를 때렸다.
 “아니, 이 양반이 뒤질라고 환쟁을 했지!
 지금이 오뉴월 삼복인줄 아나, 이 추위에 구둘에 불도 안 지피고 냉방에서 잠을 자니 쟁신이 나가도 한참 나갔구먼요.
 몸도 성치 못 하면서 몸 건수를 이러케 해서 어드러케 살갔시요.
 날래 이 숭넝 한 사발 드시라요.”
 그녀가 내미는 따뜻한 숭늉 한 사발을 받아 마시면서도 아직도 초저녁이려니 생각했다. 그러나 문밖은 환한 아침이었다.
 추위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한밤을 보낸 것이다.
 부뚜막에 놓아 둔 꿀꿀이죽이 얼어, 깡통 위로 소복이 올라와 있다.
 간밤에 눈이 제법 온 모양이다. 눈 위에 햇살이 부시다. 그는 운신하기 힘든 몸을 일으켜 햇살을 즐기고 있었다.

 “아저씨, 총알을 한 부대 주워 왔어요. 그것을 까야 할 텐데 아저씨가 까 주실래요.”
 재복이가 햇살을 가로막고 서서 총알을 까 달라고 했다.
 총알 때문에 어젯밤 내내 치도곤을 쳤는데도 아침이 되자마자 총알을 까 달라고 말하는 재복이의 본마음이 무엇이며 어찌 된 아이인지를 분간할 수가 없어서 그는 몸을 웅숭그리며 투박하게 말했다.
 “너도 총알 깔 줄 알면서 왜 아침부터 총알 타령 이가? 너희 꼬봉들도 총알을 깔 수 있을 텐데, 꼬봉들 시키지 안구 그러냐?
 총알은 상하는 물건 아니니 천천히 까도 된다.”
 그는 어젯밤의 일들을 말하고 싶었지만 어린 마음이 상할까 저어하여 그만두었다.
 “애들이 깔 총알이 아니에요.”
 “어째서 애들이 못 까?”
 “저 그게, 말하기 어려운데……하여간에 못 까요. 아저씨, 우리 본부에 가 보실래요?”
 총알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본부 얘기를 하는 재복이의 말에 정신이 혼란스럽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아이의 천진한 마음이려니 생각하며 마다하지 않고 천근만근 하는 몸을 일으켜 재복이를 따랐다.
 눈에 찍히는 재복이의 발자국이 어지럽다.
 그는 꾸부정하고 웅승맞은 모습으로 걸으면서 총알 속의 납(鉛)과 신주(놋쇠)와 화약을 생각했다. 그리고 망치로 납을 두드려 봉돌을 만들던 자신을 그려보았다.
 재복이가 총알을 까 달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이런 나를 본 때문일 것이다.
 총알은 모두 돈이 된다.
 겉은 신주로서 놋쇠 그릇을 만드는 데 쓰고, 그 속의 납은 봉돌에, 화약은 딱총에, 쇠는 고철로 쓸 수가 있어서 버릴 것이 없다.
 어지럽게 앞서가던 재복이의 발자국이 어느새 그의 발자국과 나란히 찍히고 있다.
 “나는 학교가 싫어요. 공부를 한다고 당장 돈이 생기나요, 쌀이 나오나요. 괜히 힘만 들고 돈만 들어가잖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공부는 해야지. 지금 너희 엄마는 너만을 하늘 같이 믿고 사는데 그런 소리를 하면 못 쓰는 거야.”
 신열이 나는지 머리가 지끈지끈하고 팔다리가 쏙쏙 거려 몇 마디 말하는데도 입에서 단내가 나는 것 같았다.
 “엄마를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하루라도 빨리 돈을 많이 벌어서 지겨운 고생을 벗어나야죠.
 보세요,
 성린고아원의 오 단장 아저씨 말이에요. 그 아저씨는 학교 문 근처도 안 가 봤는데 고아원도 하고 쓰레기장도 하지 않아요.”
 재복이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는 할 말이 없었다.
 지금 재복이가 오 단장을 말하는 것은 오 단장이 존경스러워서가 아니라 돈이 많기 때문이다.
 고아원의 아이들 수를 늘려 구호물자를 부정하게 타는 것이 도둑질이고 못된 짓이라는 것을 재복이도 안다.
 그렇지만 재복이에게는 공부하느라고 돈 버리며 허기진 생활을 하느니보다는 오 단장처럼 좋지 않고 위험은 해도 돈을 벌 수 있는 총알이 더 중하고 급하다.
 재복이가 이렇게 말하는데 선악을 구별하고 정의와 불의를 말하며 현재와 미래를 말해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아무 말도 못 하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초라하고 구차해 보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못남을 이겨내기라도 할 양으로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도 공부는 해야 하고 너희 어머니는 장하고 훌륭한 어머니이다.”
 훌륭하고 장한 어머니라는 말에 재복이도 마음이 하리 해졌다. 그리고 금세 물 내린 사람처럼 돼 맥없이 고무신 코끝으로 눈을 풀썩풀썩 차올렸다.
 재복이의 마음이 하리해진 만큼 그의 신열이 부다듯하게 일어났다.
 눈 위에 찍히는 그의 발자국 힘이 약해지는 듯싶더니 푹석 주저앉듯 쓰러졌다. 눈 위에 쓰러진 그의 모습은 흰눈과 대비가 되어 더욱 초라하고 고스러져 보였다.
 “소리개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아저씨! 아저씨! 정신 차려 보세요!”
 재복 이는 다급하고 황급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급히 그를 일으켜 세우려고 했다. 온몸이 불덩이 같고, 그의 몸이 눈 속으로 잦아드는 것 같았다.
 몸도 좋지 못한 소리개 아저씨에게 쓸데없이 학교 얘기며, 총알 얘기를 해서 아저씨의 신열이 갑작스럽게 일어났다고 재복이는 믿었다. 좀 더 고분고분 굼놀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재복이는 급히 집으로 향했다.
 “오마이!! 소리개 아저씨가 쟁신을 일었어요! 어머니 빨리 와 보세요.”
 재복이도 급한 김에 황해도 사투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무슨 소리가?!
 소리개 아저씨가 어떠하다 되었다고?!
 쟁신을 일타니, 무슨 소리가?
 어디서 어떠케 되었다는 기가?!
 빨리 가 보자우야!”
 한쪽 몸빼 자락을 추켜올리고 안악댁이 뛰기 시작했다.
 재복이도 뒤를 따랐다.
 안악댁이 그를 업었다. 생각 보다 남자의 몸무게가 가볍고 푼더분하지 않았다.
 “재복아, 날래 날래 구둘에 불 지피라우야!
 내 얼렁 가서 침쟁이 하나바이 불러올 테니끼.
 아니 침보다는 다이아찡이나 겐기락이 있어야 할 텐데 어드메서 구한다지?
 야, 이거 야단 났구나야.”
 안악댁은 허둥대기만 하고 질정(質正)하지 못했다.
 재복이가 불을 피워 방을 덥히고 있는 사이에 안악댁이 어디서 구했는지 양귀비 대를 한 움큼 가져 왔다. 그녀가 양귀비 대를 급히 물에 끓였다.
 그 사이 재복이는 소리개 아저씨에게 미안도 하고 걱정도 돼서 집을 나왔다.
 재복이가 소리개 아저씨를 보고 본부에 가자고 한 것은 총알 때문이 아니었다.
 본부에는 장갑차 사격장에서 쏘는 기관총 총알이 아니고 옥돌고개 위에서 쏘는 105㎜ 포 포탄이다.
 105㎜ 포탄은 총알과 달리 크기가 한 팔만 하고 화약 대신 신관(信管)이 있어서 아무나 분해를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재복이는 소리개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그런데 엉뚱한 일이 일어나서 105㎜ 포탄을 보여 주지도, 분해를 청해 보지도 못하고 큰 낭패만 보고 말았다.
 재복이가 집에 와 보니 소리개 아저씨는 양귀비 물을 먹고, 정신도 차리고, 몸의 열도 내렸는지 미음을 먹고 있었다.
 “간밤에 냉골에서 자서 고뿔이 든 모양이야요.
 살기 심 들고 하기 실어도 할 일은 해야지요.
 맹탕으로 지낼라고 하면 되갔시요.
 이제 소리개 아자씨도 몸 생각도 하고 살아갈 궁리도 하시라요.
 아자씨, 오날 밤에는 땀을 쭉 내시라요.
 고뿔에는 땀내는 것이 제일이니까요.
 재복아, 이제 건너가 자자.”
 재복이는 잠이 오지 않았다. 상념이 물안개처럼 피어올랐다. - 이울은 소리개 아저씨의 허약한 모습, 시나브로 더해 가는 엄마의 공부 타령, 105㎜ 포탄의 처리 문제.
 재복이는 105㎜ 포탄에 생각이 이르자 무르춤해 졌다.
 만약 소리개 아저씨가 감기에 걸리지 않아서 105㎜ 포탄을 보았다면 흐리터분은 하나 고지식한 아저씨가 가만히 있었을까? 아마도 M.P나 주재소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저씨가 본부에까지 못 간 것이 다행이었다.
 그러나 105㎜ 포탄의 분해 작업을 생각하면 걱정이 태산 같다.
 105㎜ 포탄은 뜨거운 감자다. 먹자니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분해 작업을 혼자 해야 하고 버리자니 모처럼의 돈벌이가 수포로 돌아간다.
 포탄을 분해만 하면 쌀이 한 말이 된다.
 그러면 적어도 한 달 동안은 너무 먹어서 물린 꿀꿀이죽을 먹지 않아도 된다.
 그러자면 해체를 해야 한다. 누구하고 한단 말인가? 소리개 아저씨? 꼬봉들? 아무도 없다. 결심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잠이 들었다.
 왁자지껄한 소리에 재복이는 눈을 떴다.
 “요번 서무날부터 동막을 연다지?”
 “열면 무슨 소용이 있어, 해래기 하나 없이 죽어 자빠졌는데.”
 “참말로 기름이 독하긴 독한 모양이야. 산 것이라고는 모두 죽여 버리니 말이야. 그래도 멀리 있는 삐쭈기는 캘 수 있지 않을까?”
 “다 소용없어 갈매기나 새도 먹을 게 없어 굶어 죽는 판에 이녁네 잡을 조개가 어디 있겠어?”
 “괜한 소리 지끄리지 말라우요. 아무리 없다고 해도 갯바당에는 나가 봐야지. 오랜만에 동막을 열겠다는데 나가 보지도 안코 공염불만 하면 무슨 소용이 있갔시요?”
 안악댁이 한오금을 박듯 말했다.
 기름 때문에 온 바다가 죽어간다 하더라도 다시 조개를 잡는다는 말만으로  별장 사람들은 새로운 삶의 활기를 찾았다.
 녹슨 갈퀴와 거래를 닦고 망태와 바구니를 씻었다.
 서무 날 물때까지는 닷새가 남았다. 닷새가 열흘처럼 지루하게 여겨졌다.
 온 동네가 바다에 나갈 일로 법석인데 재복은 전과 달리 시큰둥하다. 재복이 에게는 포탄 분해가 더 급하다. 안악댁은 재복이의 행동이 수상했지만 바다에 나갈 일로 정신이 없었다.
 사람들이 조개 캘 준비에 바뿐 동안 재복이는 포탄을 분해하기로 마음먹었다.
 준비 작업을 착착 진행했다. 망치와 끌이 필요했다.
 끌은 날카로우면서도 끌 날이 강해야 한다. 망치로 한번 치면 무 잘리듯 단번에 잘려서 105mm 포탄의 신관(信管)에 충격을 주지 말고 작약(灼藥)에 전해지지 말아야 한다.
  “소리개 아자씨는 사도질하려 가깟시까? 조개 캐러 가깟시까? 날래 장만을 하시라요.
 온 동네가 야단들인데 아자씨만 빈둥대고 있으면 어드러케 하갔시요.
 빵구 난 쟁화도 고무풀로 부쳐 났스니끼 얼렁 채비 하시라요.”
 안악댁의 채근이 전보다 심한 것으로 봐서 재복이의 속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분이 소풍 갈 아이의 날 밤샌 뜬 눈 모양이다.
 바람도 거세지 않고 햇살이 따사로운 것으로 봐서 여느 때 같으면 조개가 많이 잡힐 날이다.
 물 내린 사람 같던 그도 안악댁의 몸 구완으로 마음과 몸이 한결 가볍고 상쾌해졌다.
 조개 잡으러 가는 행렬은 파란 하늘에 일렬종대로 날아가는 기러기 떼와 같다.
 그는 앞서가는 안악댁의 뒷모습을 보았다. 펑퍼짐한 엉덩이를 씰룩씰룩하며 걷는 모습이 전보다 심한 것으로 보아 한 달여 만에 잡을 조개에 대한 기대가 대단한 모양이다.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운 것처럼 그의 발걸음도 가벼웠다.
 바다에는 손가락이 들어갈 만한 칙게 구멍, 별표 모양의 가막조개 구멍, 물을 보골 보골 내 뿜는 참맛조개 구멍, 보일 듯 말 듯한 갯지렁이 구멍 등 많은 구멍이 있다.
 이런 구멍들은 생명체의 상징이며 생존의 표본이다.
 각양각색의 구멍 속에서 자연의 균형과 개체의 존속이 이루어진다.
 이런 구멍들 때문에 구멍 밖의 소라, 망둥이, 우럭, 전어, 갈매기 등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고 존재할 수 있다.
 심지어 사람들조차도 이 구멍의 혜택을 받고 산다.
 그런데 이러한 구멍들이 기름띠 때문에 모두 없어지고 사라졌다.

 네 시간이 지나야 바다에 나간 사람들이 돌아온다는 것을 아는 재복이는 오늘이 105㎜ 포탄을 분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날이라 생각했다.
 동네가 호젓하고 적막한 가운데 예닐곱 살 먹어 보이는 아이들이 무슨 술래잡기를 하려고 하는지 ‘하날 때, 두알 때, 사마중, 날 때, 육낭거지, 팔 때, 장군, 고드래뿅’하며 술래를 불러 술래를 정하고 있었다.
 재복이는 망치와 끌을 가지고 본부로 향했다.
 목수가 망치질을 할 때 망치로 끌을 한번 치면 파고자 하는 깊이만큼 정확하게 파야 한다.
 이런 목수 질이 곧 목수의 손맛이다.
 재복 이에게도 지금 이런 손맛이 필요했다.
 망치로 끌을 쳐서 정확하게 신주의 두께만큼만 잘라 내고 끌날은 다른 부위에 충격을 주지 말아야 한다.
 재복이는 힘을 주어 끌을 내리쳤다.
 너무 약한 손맛이었다. 단지 신주에 흠집만 내고 말았다.
 다시 내리쳤다. 이번에는 손맛이 제대로 맞아 떨어졌다. 포신의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두 번 세 번 계속 이어졌다.
 성공이다.
 재복이는 자신의 손맛에 신들인 사람처럼 105㎜ 포탄의 신관(信管) 가까이로 끌을 가져가며 망치로 내리쳤다.
 꽈꽈꽝!!!!
 나오지 않는 가막조개만큼 안악댁의 손놀림이 바쁘다. 너무 급히 캐는 바람에 오른손에 잡은 갈고리와 왼손의 개흙 뒤집기가 엉키어 왼손에 작은 상처가 났다. 그녀는 나오는 피를 갯물에 씻으려고 허리를 폈다.
 그 순간 큰 굉음과 함께 청량산 쪽에서 연기와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이를 본 안악댁은 비수의 칼날이 가슴에 꽂혀서 빠지지 않는 아픔과 총알이 가슴을 뚫고 지나가 구멍이 뻥 뚫린 헛헛함을 느꼈다. 맞다. 재복이의 총알.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무슨 사고가 일어난 모양이야 하는 단순한 기운만 느낄 뿐이다.
 그도 조개 잡던 갈고리와 망태를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그녀는 벌써 갈고리와 망태를 집어 던지고 청량산으로 향하고 있다.
 “잘 뒤졌지, 잘 뒤졌어. 이런 세상에서 살면 뭐 하갔서?
 신수가 나아 지갔서, 팔자를 고치 갔서?
 지 고생이고 남 고생시키는 일이지.
 지겨운 세상 잘 떠났지, 잘 떠났서.”
 그가 주재소에서 안악댁을 만났을 때 그녀는 한 손을 머리에 대고 푸념하듯 허공을 바라보며 이렇게 되뇌고 있었다.
 “죽일 놈, 에미 맴을 이러케 무질러 노코 가면 속이 편하더냐?
 약이라도 한 첩 먹고 갈 것이지. 이러케 무단이 가면 에미는 서운해서 어드러케 살란 말이냐?
 못 쓸 놈의 아새색기 같으니라구!
 지지리두 못난 놈이니끼 그러케 갔지, 왜 갔갔서?”
 자식을 잃은 슬픔이 복받치는지 한참을 울부짖다가 또 무엇을 잊으려는 듯 머리를 도리도리 졌기도 했다.
 그는 그녀에게 위로를 해야 한다고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되뇌었지만, 겉으로는 말 한마디 못하고 순사에게 가서 단지 잘못했다고 빌고만 있었다.
 잘못이 그녀와 재복이에게 없다. 다만 그녀를 빨리 주재소에서 빼내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어린애가 돼서 아무것도 모르고 장난을 한 모양이니 한번 너그럽게 생각하시고 용서해 주십시오. 자식을 잃은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한번 풀어 주십시오.”
 “지금 시국이 어떤 시국인지 아시오. 미군 M.P들이 야단들이오. 애를 어떻게 돌봤기에 이런 폭발물 사고가 났단 말입니까? 나 혼자 처리할 문제가 아니니 미군 M.P에게 찾아 가 보시오.”
 그는 영어 나부랭이를 하는 오 단장을 찾아갔다.
 호언장담하는 오 단장의 말과는 달리 그녀는 한 달이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막상 돌아온 그녀는 그가 걱정 한 거와는 달리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성마르고 악착스럽던 모습이 사라지고 무표정하고 말수가 없이 혼자 방에만 있었다.
 이런 그녀의 갑작스런 변화는 그에게 또 다른 불안과 초조함을 불러일으켰다.
 후드득 후드득 물 내리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봐서 안악댁이 사흘 만에 방에서 나와 목욕을 하는 모양이다.
 목욕 소리가 힘 있고 세차다.
 그는 그녀가 쏟아 내리는 목욕물로 지난 모든 시름을 씻고 전과 같이 굳건하고 굼튼튼해 지기를 바랐다.
 그녀의 목욕 소리는 지금까지 그를 계속 감싸던 불안과 초조를 말끔히 씻어 주고 그녀의 새로운 재기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이런 안악댁을 보고 그도 이제는 활기차게 바다에도 나가고 돈벌이가 있으면 하리타분하게 굴지 말고 적극적으로 나가 벌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오늘은 늦은 물때이다.
 그래도 동네가 번잡하고 어수선한 것을 보니 모두가 바다에 나갈 모양이다.
 그도 안악댁의 변화에 힘입어 바다에 나갈 용기와 여유가 생겼다.
 바다는 아직도 황폐하고 고갈되어 있다.
 있는 조개를 잡는 일보다 없는 조개를 잡는 것이 더 어렵고 지루하다는 것을 바다가 상하고 병든 후에야 모든 사람들이 비로소 절실히 느꼈다.
 아침에 안악댁이 목욕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는 그녀가 앞으로 새롭게 살아가리라 믿었다. 그러나 바다에 나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갑자기 목욕을 하는 일이라든지, 모두 바다에 나가는데 혼자 집에 있는 일이라든지, 여러 가지 수상스러운 생각이 떠올랐다.
 그녀에 대한 불길한 생각이 시나브로 더해 가면서 잡히지 않는 조개만큼 마음이 어둔하고 찝찝했다.
 때가 해거름을 지나 어스름해지기 시작했으나 물이 들어오기에는 아직 반 마장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마음이 조조(燥燥)해져 조개를 더 캘 수가 없다.
 그는 남보다 먼저 갯바당을 나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안악댁의 방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다.
 닭살이 돋고 솜털이 송골송골해지며 머리털이 쭈뼛쭈뼛 해졌다.
 “소리개 아저씨, 장고개 큰 소나무에 재복이 엄마가 있어요.”
 침쟁이 할아버지의 손자가 무서움에 떨면서 말했다.
 그는 장고개로 급히 향했다.
 어스름이 더해가는 장고개에는 큰 소나무가 두 팔을 벌리고 서 있다.
 큰 소나무는 이내 기운이 서려 침침하고 음울해 보였다.
 그는 무서움증과 두려움이 앞섰다. 이런 공포와 걱정이 현실로 나타났다.
 결국 안악댁은 갔다.
 그녀의 죽음이 어디서 왔는지 알고 싶었다. - 전쟁, 재복이의 죽음, 찌든 생활, 암울한 미래.
 어느 것 하나 확실한 해답이 아니다. 이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돌아가는 지금의 세상이 그녀를 데려갔는지도 모른다.
 그녀에 대한 못다 한 마음의 정이 그의 가슴에 밀물처럼 밀려 왔다.
 그녀가 없는 그녀의 방에 우두커니 앉아 있다가 궤짝 위의 베개를 보았다.
 베겟모에 빨간 자수의 수(壽)자와 복(福)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정신을 잃었을 때 몸 구완을 하면서 그녀가 하던 말이 글씨와 함께 어우러져 머릿속에 맴돌았다.
“이 베개는 큰 뜻이 있는 것이야요. 재복이 아바이가 인민군에 끌려가기 전에 써 준 글자인데 내가 수를 놓은 것이야요. 복되게 오래오래 살자는 뜻이지요. 그런데 한 번도 베보지 못하고 지금은 어드러케 되았는지---.”
상념에 잠긴 듯 먼 데를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참으로 이상도 하지 안카시오. 소리개 아자씨가 이 베개를 처음 베게 되었으니 말이 왜다.”
아직도 그녀의 음성이 들리는 듯 했다. 그는 베게를 꺼내 부둥켜안았다. 눈물이 났다. - 오래오래 복되게 살자더니.
그녀에 대한 못 다한 마음의 정이 물밀 듯이 밀려 왔다.
 낙조의 역광을 받으며 바다에 나갔던 사람들이 힘겨운 하루의 일을 마치고 들어오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점점이 떠 있는 섬들 사이로 떨어지는 살찐 단 호박 같은 태양은 그들의 지친 모습과 달리 평화롭고 한가로워 보였다.
그러나 어려운 삶을 이어가는 그들은 낙조의 아름다움이나 황혼의 멋을 감상하거나 느끼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다.
오직 그들에게는 살아남는 것만이 전부였다.
“아니, 이게 누구여? 소리개 아저씨 아니어?”
맨 먼저 나오던 어촌계 감찰 아저씨가 놀란 듯이 외쳤다. 둑 머리에 쓰러져 있는지 꼬꾸라져 있는지 알 수 없게 그가 쓰러져 있었다.
“이거 죽은 거 아니어?”
뒤따라오던 침쟁이 할아버지가 걱정스럽게 그를 보며 말했다.
“움직이는 걸 봐서는 죽진 않았는데요.”
누군가가 말했다.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그는 머리를 힘들게 들어 올렸다.
“아니, 이 사람아, 아무리 세상이 살기 어렵고 힘들어도 목숨을 중히 여겨야지, 마구 몸을 휘둘리면 되겠는가? 정신 차리게, 일어나 빨리 가세.”
침쟁이 할아버지가 그의 몸을 일으키려 하자 뒤에서 누군가가 빈정대듯 말했다.
“그만두세요. 데려간들 끼니가 있겠어요, 아니면 누가 돌봐 주는 사람이 있겠어요? 안악댁이 죽은 후부터는 저렇게 매일 돌아다니기만 하는데요.”
“그래도 사람은 살려야지!”
“저 사람이 죽는 것을 겁내나요. 우리네완 생각이 틀려요.”
“이 사람들아, 시끄러! 어서 부축해 동막으로 데려가세!”
그러나 누구 하나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다. 둘러선 군상들 사이로 비치는 낙조를 바라보며 희미한 의식 속에서 그는 외쳤다.
-당신들과 나는 다른 게 없소.
-우린 다 같이 힘든 세상을 살아가고 있소.
-내가 방황하며 죽어가고 있는 줄 아시오?
-아니오.
-다만 당신들이 살아보지 못한 곳을 찾고 있는 중이오.
그의 외침은 아무도 듣지 못하는 외침이었다. 제법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이 사람들아! 어서 데려가세!”
“쓸데없는 일이에요. 데려다 놓으면 내일 또 큰 소나무다, 쓰레기장이다, 동막이다, 하면서 게걸스럽게 돌아다닐 덴데요.”
희미해져 가는 발소리 뒤로 붉은 바다가 너울너울 춤추고 시선의 끝머리에는 어둠이 밀려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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