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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진 의학에세이[11] 현대의학의 발자취를 따라서
김영진 의학에세이[11] 현대의학의 발자취를 따라서
  • 김영진 고려대 의료법정책연구센터 연구위원·치의학박사
  • 승인 2020.05.10 1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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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진보적 경험과 지식의 축적
김영진 박사
김영진 박사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유럽의 약국들에서도 미세하게나마 과학의 입김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아직 고대로부터 사용되어온 약초를 그대로 쓰고 있었지만 신통치 않은 약물의 일부는 식물의 증류 엑기스나 무기물질로 대체되어 가고 있었다.

잘 정비된 당시의 약국에는 전통적인 유발이나 유봉 뿐 아니라 증류기나 냉각기 같은 장치까지 갖추어져 있었다. 약국은 또 인이나 불소를 맨 처음 발견한 화학실험실의 역할을 했다.

17세기 중엽에는 과학적 사고와 실험정신의 결과 새로운 지식과 기술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화학, 기계, 식물학, 비교해부학, 기술해부학, 실험생리학, 역학 및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 등 다방면에서 이후 약 200년에 걸친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새로운 지식이 밀려들자 의사를 비롯한 과학자들은 의학적인 모든 생각과 행동이 이성적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즉 어떤 법칙과 원리에 의하여 이론적 토대를 이루고 난 연후에 이를 실용화하고 현실에 응용하는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때까지 축적되었던 수많은 지식을 정리하고 폐기하면서 새롭게 발견되는 사실들을 과학적으로 체계화시켜야 했고 그러자니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었다.

말라리아 치료제 키니네의 원료인 키나나무(금계탑).
말라리아 치료제 키니네의 원료인 키나나무(금계랍).

당시 런던의 ‘워쉬풀’ 협회처럼 권위 있고 강력한 약제사 길드의 엄격한 통제하에 약제사들은 인삼 엑기스와 같은 식물의 순수한 추출물인 ‘갈레누스’ 제제뿐만 아니라 탄산암모늄과 암모니아수를 화합하여 각성제 같은 화학약품도 제조할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그때까지 개발된 약물 중 가장 뛰어난 것 중의 하나는 키나의 껍질이다.

키나는 토근과 마찬가지로 17세기에 남미에서 유럽으로 도입된 것인데 남미로 이주한 사람들이 키나의 껍질이 말라리아가 일으키는 고열 증상에 효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는 대량으로 유럽에 수출했다.

오늘날 말라리아의 특효약인 키니네가 이 키나의 껍질로부터 화학적으로 분리된 것은 그로부터 200년이 지난 19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능해졌지만, 버드나무 껍질과 마찬가지로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치료제의 하나가 이때 발견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달성된 또 하나의 빛나는 약물학적 업적은 바로 ‘디기탈리스’의 발견이다.
1775년에 ‘윌리엄 위더링’이라는 영국의 의사가 심장병약으로서가 아니라 부종 제거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어떤 약초에 대해서 각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시롭셔에 살고 있던 한 노부인이 의사도 고치지 못하는 부종증을 몇 번이나 이름 없는 약물로 치료해 주곤 했었는데, 그 할머니는 이 처방을 자기만의 비밀로 간직해 왔다.

의사가 관심을 쏟은 노부인의 처방은 당시의 다른 처방과 마찬가지로 20여 종 이상의 성분을 섞은 것이었다. 그러나 ‘위더링’은 약용식물에 대한 지식을 갖춘 의사였으므로 그 성분 중의 대부분은 쓸모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그중 단 하나의 약초에 초점을 기울였다.

디기탈리스
디기탈리스

즉 초여름 이곳저곳에 귀여운 보랏빛 꽃을 피우는 ‘디기탈리스’ 잎에 부종증에 효과가 있는 약효의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나 하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디기탈리스’ 잎으로 만든 차를 부종 환자에게 먹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차를 마신 환자들은 오줌의 양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부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위더링’은 그 약물에 대해 10년간이나 연구를 더 계속했다. 그는 ‘디기탈리스’의 잎을 성장 과정의 일정한 시기에 채취함으로써 일정한 약효를 가진 ‘엑기스’를 추출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또한 효과적인 투여량도 경험적으로 산출해 냈다.

1785년에 그는 자기의 연구 결과를 집약한 한 권의 책을 출판했다. ‘디기탈리스와 그 의학적 이용에 대하여’라고 명명된 이 책은 고난에 찬 의학 연구의 고전으로서 인류의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러나 신장에 작용하여 효과를 나타낸 것이라는 그의 보고는 현대의 과학적 연구로 밝혀진 결과와 다른 것이었다.

1930년대에 이르러서 ‘디기탈리스’가 신장에 작용하는 게 아니라 직접 심장의 근육에 영향을 준다는 것이 증명된다. 즉 심근의 힘찬 수축에 의해 효율적인 혈액순환이 일어나고 이것이 신장에서의 여과 기능을 촉진함으로써 이뇨효과를 나타낸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실로 150년의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디기탈리스’의 진면목이 ‘이뇨제’에서 ‘강심제’로 재정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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